지난 삶에 대한 고해성사/병석의 具常시인 신작‘인류의 盲點에서’
기자
수정 1998-06-11 00:00
입력 1998-06-11 00:00
진득하게 한 길을 걸어온 대가의 역작은 아름답다.교묘한 말의 치장보다는 진실을 담은 시를 줄곧 써온 ‘문단의 어른’구상시인이 신작시집 ‘인류의 맹점(盲點)에서’(문학사상사)를 상재했다.
모진 세파가 한결같이 맑은 그의 시심을 시샘했을까.시인은 시집이 나오기 전 뜻밖의 교통사고로 병상에 누워 있다.몸은 병마와 싸우고 마음은 시집을 통해 파렴치한 세상과 겨루고 있다.부지런함이 시인의 삶이었듯 여든을 바라보는 세월인데도 쉴 틈이 없다.
92∼93년에 걸쳐 문학사상에 연재한 ‘관수재시초’36편과 최근작 37편을 묶은 이번 작품은 자신의 삶에 대한 고백성사의 성격을 띠고 있다.겉치레로 시를 쓰며 한 평생 자신을 속여왔다는 한탄마저 서슴지 않는다.
한 걸음 나아가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는 노시인의 예감을 투영한 듯 군데군데 세상이라는 군더더기를 버리려는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인생의 노을을 바라보는 시선은 담담하고 차분하다.시인에게 죽음은 “영원에의 통로요,회귀요,/또 하나 새 삶의 시작일 뿐”이기에 그 이미지는 어머니의 부름처럼 정겨운 것이다.
저만치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를 초월한 시적 경지는 현세를 넘는 우주적 연민으로 나타난다.“…이 민들레와의/순수한 만남은 결코 끝난 게 아니라/마치 이승을 떠난 어버이나 아내처럼… 다시 만나 더불어 /영원을 누릴것을 굳게 믿고 바란다”는 심정 피력이나 30년전 주워온 검정 바윗돌과 나누는 궁극적 완성에 대한 교감은 범신론적 인식마저 느끼게 한다.장독대나 고목(枯木)둥치서 시인이 평생 의지해온 ‘그 분’을 찾는 모습은 가톨릭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모든 사물에게서 존재의 숨결을 발견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도도한 경지는 “늙음과 병약과 무사를 핑계로 삼아 태만과 안일과 허위에 차 있다”고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는 존재론적 탐색이 빚은 열매다.항상 주위에서 과실을 따먹기만 해온 남들을 탓하기보다 자신의 때를 내보이면서 더 남루한 사람들의 때를 씻어주려고 애써 온 큰 걸음의 자취다.
세상살이와 시가 하나가 되기 어려운 시대에 시인의 잠언은 보기드문 진실로 다가온다.그 노래는 아파트의 콘크리트 숲에서도 인정을 꽃피우고,뿌리의 숨은 인고(忍苦)를 찬양하고,하나의 낱말에서 소우주(小宇宙)세운다.
순백의 동심으로 일관해온 시심의 고갱이는 강요하지 않아도 감동으로 다가온다.하루빨리 병상에서 박차고 일어나 ‘황금 송아지’의 노예가 된 ‘맹점(盲點)의 인류’에 다시 한번 자성의 빛을 던져주었면 하는게 그를 아는모든 이의 바람이 아닐까.그는 아직 할 일이 많은 ‘문단의 어른’이다.<李鍾壽 기자 vielee@seoul.co.kr>
1998-06-11 13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