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진단’에 긴급한 ‘처방’/금융시장 안정대책 발표 의미

  • 기사 소리로 듣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공유하기
  • 댓글
    0
기자
수정 1997-08-26 00:00
입력 1997-08-26 00:00
◎한보·기아사태 등으로 ‘금융공황’ 위기의식/해외 신용도 고려… 정부 가시적 지원 결정/“지원은 하되 특혜는 없다”로 통상시비 미리 차단

정부가 25일 발표한 금융시장 안정화 대책은 ‘뒤늦은’ 진단에 따른 ‘긴급’처방의 성격을 띠고 있다.금융시장이 위기는 아니지만 불안요인을 방치할 경우 ‘금융공황’을 야기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됐다.정부는 금융시장이 위기가 아니라고 말한다.예금인출 등 신용붕괴의 조짐이 전혀 없는데 무슨 ‘공황‘ 운운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부적으로는 ‘시장의 실패’를 인정하고 있다.자금시장이나 외환시장에서 수요과 공급의 문제는 없으나 한보와 기아 등 뜻하지 않는 사건으로 자금이 돌지 않는 자금의 ‘경맥동화’ 현상이 심한 것을 인정한다.시장원리와는 관계없는 외부적 요인에 따른 교란이라는 것이다.따라서 시장 불안요인을 없애고 금융질서를 해치는 대내·외 충격을 흡수하는 것은 시장개입과는 무관한 정부 본연의 임무라는 시각이다.정부가 시장경제에 충실하자는 것과 ‘시장의 실패’를 방치하는 것은 별개라는 뜻임을 강조하고 있다.

정부가 이날 발표한 대책은 크게 국내 금융기관에 대한 지원과 대외 신인도 제고 방안으로 나뉜다.정부는 특히 제일은행과 종금사에 대한 한은 지원과 관련 ‘특융’이라는 말을 자제했다.국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발권력을 통한 자금지원임을 의식해서다.강경식 부총리도 “한은에서 특별히 자금을 지원한다”고 ‘특융’을 꺼렸다.연 8.5% 금리도 과거 3%에 비하면 높은 수준이다.세계무역기구(WTO) 체제하에서 보조금과 관련한 통상시비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계산이기도 하다.

강부총리는 또 지난 24일 5자회동을 마치고 자택에서 “과거와 같은 (특혜성) 지원방식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그러면서 은행과 종금사를 부도내지는 않겠다고 강조했다.제일은행에 한은 특융을 지원하되 특혜의 소지가 없도록 제일은행이 아닌 은행에 대한 지원기준을 명시하겠다는 뜻이었다.

종금사에 대한 지원대책은 지난 22일 종금사 사장단 결의에 앞서 마련됐었다.정부는 종금사 대표들이 계속 어려움을 호소하자 “정부가먼저 나설수 없으니 그 쪽(종금사)에서 먼저 결의를 해달라”고 귀뜸,‘선 종금사 결의 후 정부지원’이라는 수순을 택했다.정부 관계자는 종금사가 재경원에 건의한 내용은 정부가 알려준 ‘각본’에 충실했다고 박혔다.종금사에 대한 지원은 제일은행과 달리 특혜 시비가 적고 업종 전체의 구조조정과 맞물려 있다.게다가 부도유예협약으로 종금사의 자금난이 심화된데다 기아 등 협력업체와의 회생과도 연관됐기에 지원방안은 어렵지 않게 결정됐다.

문제는 제일은행이었다.해외에서 시중은행의 신용이 불합격 판정을 받으면 다른 금융기관의 신용도 동반 하락한다.해외차입이 차단되면 국내 외환시장에서 외화가 수요가 급등,환율을 교란시킨다.최근 종금사의 외환부족에 따른 환율 급등이 좋은 사례이다.종금사의 외환부족은 한은의 외환보유고 지원으로 일단락됐으나 제일은행의 경우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S&P가 내달 초까지 정부의 가시적인 조치가 없으면 신용을 한 등급 낮추겠다고 통보했다.

때문에 정부로서는 시장원리를 고집하고 싶어도 가시적인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다.다만 특융 지원 등에 따른 책임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가 한껏 뜸을 들인게 아닌가 싶다.강부총리도 “주변에서 무엇을 요구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그렇지만 아무 것도 안하고 인내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라면서 국민의 공감대를 말했다.‘자리를 깔아달라’는 주문이었던 셈이다.<백문일 기자>
1997-08-26 7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에디터 추천 인기 기사
많이 본 뉴스
원본 이미지입니다.
손가락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확대해 보세요.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