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학술적 업적 다채롭게 재평가/「위창 오세창전」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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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6-04-08 00:00
입력 1996-04-08 00:00
그러한 반응은 말할 것도 없이 위창의 다채로운 역사적 생애와 빛나는 업적에 대한 각계의 인식과 평가가 그만큼 넓혀져 있음을 반증한 것이다.전시내용은 위창의 고격한 전서와 예서 중심의 글씨를 비롯하여 전각의 탁월한 경지를 보여주는 여러 형태의 돌도장및 그 실인과 인보들,그리고 한국 서화사 연구의 가장 빛나는 선구적 업적인 「근역서화미」(1928년 간행)의 초고 원본,그밖에 필적 등으로 구성됐었다.그 전시품들은 대부분 유족들이 보존하고 있는 것들이었으나,사회각계와 개인의 귀한 소장품들이 나온 것도 상당수였다.
한편으로 사람들이 익히 알고있는 위창의 선친인 역매 오경석 형제들의 문인적인 서화 유품들과 역관으로 청국을 왕래하며 관심갖게 되었던 역매의 금석학 연구 실적의 「삼한김석녹」원본 등도 전시되어 눈길을 끌었다.관람자들은 위창의 글씨·전각·금석학 및 한국 서화사 연구가 그러한 가문의 배경과 깊이 연관된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위창에 대한 더 폭넓은 관심을 가진 이들은 이번 전시를 통해 한층 각별한 감동과 어떤 사회적 요망을 느꼈을 것으로 생각된다.유족측이 적극 협조하여 예술의 전당이 꾸몄던 이번 위창 재조명의 전시품들이 소장자들에게 되돌려지면,앞으로 또다른 특별전시 기회가 없는한 보기 어렵다.그것이 사회적으로 안타까운 것이다.
위창은 앞의 전시내용 이상으로 두드러지고 다채로운 역사적 활동과 예술적 내지 학술적 업적으로 빛나는 근대 한국의 뚜렷한 인물이다.국운이 기울던 구 한국시대에는 언론인,개화사상가,우국지사,민족계몽가로 활약했다.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뒤의 3·1독립운동 때에는 33인의 민족대표에 가담하여 선두에섰다.그로인해 옥고를 치른 뒤에는 고매한 서예와 전각 및 명품 고서화 감식의 권위로 생활하면서 한편으로 역대 서화가 기록 및 작품의 조사정리와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1921∼1936년의 민족사회 서화협회전람회에서는 상징적 구심점이 되어 해마다 참가하기도 했다.그 사이,이미 언급한 최초의 한국서화가사전인 「근역서화미」출간외에 「근역인누」(역대 서화가와 문인이 사용한 동장의 날인(날인)을 방대하게 모은 자료.현재 국회도서관 소장,1968년 출판),진필편화 수집첩인 현재 서울대학박물관 소장의 「근역서휘」(37첩)와 「근역화휘」(천·지·인 3첩),그밖의 또다른 수집서화첩인 「근묵」(34권) 등이 위창의 필생의 서화연구 업적물들이다.
위창 생애의 그 역사적 전모와 공적을 사회적으로 깊이 칭송하는 「위창 기념관」,아니면 어느 미술관의 상설특별실이라도 없어진다면 사회교육적으로 의미가 클 것이다.그런 생각을 이번 위창전에서 많은 사람이 했을 법하다.나의 마음도 그렇다.<이구열 미술평론가>
1996-04-08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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