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근배 그산하에 가다(동학의 함성을 찾아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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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4-02-09 00:00
입력 1994-02-09 00:00
올해 2월10일은 동학혁명 1백주년이 되는 날이다.가렴주구의 만석보 수세가 그 도화선이 되었다.18 94년 이날 분노한 농민들이 고부관아를 쳐들어간 것이다.전봉준을 우두머리로 한 미완의 혁명이었지만,그 정신은 우리의 자아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외세에 대한 민족자존의 역사요,부패 봉건체제에 대한 민중의 항거이기도 했다.서울신문사는 동학혁명 1백돌을 기념하기 위해 전국 격동의 현장에 취재팀을 보냈다.거기서 이근배시인은 대서사시를 쓰고,동행한 기자는 역사를 엮었다.

◎횃불 타오르다/「풀뿌리 혁명」 100년 서사시로 돼새긴다

해가 뜬다 둥둥

배들평야에 해가 뜬다

황토재에 해가 뜬다

갑오년의 해가 뜬다

전봉준의 해가 뜬다

흰옷 입은 백성들아

뜨는 해를 보아라

이 기쁜 설날 아침

가슴에 뭉친 설움일랑 털어버리고

천지신명께 비는 마음으로

뜨는 해를 보아라

오백년 왕조의 기둥뿌리는 썩어가는데

해는 떠서 무엇하나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

설날이 와도 먹을 것이 없는데

해는 떠서 무엇하나

꽝꽝 얼어붙은 배들평야녹이려

해가 뜬다 더냐

황토재 몰아치던 눈보라 쓸어내려

해가 뜬다 더냐

고을마다 백성들 피고름 짜내는

고부 군수 조병갑이 같은 탐관오리

천벌주려 뜬다 더냐

난리 난다 난리 난다

쥐불처럼 번지는 소문

틀어막으려 해가 뜬다 더냐

오냐 오냐 알겠다

다섯자 남짓 작은 키에

상투 쫓은 전봉준이

전라도 정읍땅 새집 마을 한 귀퉁이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눈 부릅뜨고 앉은 전봉준이

일어서라는 해로구나

때가 왔다 때가 왔다

일러주는 해로구나

아니다 아니다

전봉준이의 해는 백성이다

전봉준이의 하늘은 백성이다

전봉준이는 백성들의 가슴속을 본다

그 끓어오르는 설움을 본다

나라를 살리려는 붉은 마음을 본다

전봉준이는 산을 본다 들을 본다

이나라 백성들 말고 누가 이땅을 밟으랴

왜놈들이 어디라고 넘보느냐

양놈들이 어디라고 기웃거리느냐

백성들을 살려야 한다

나라를 지켜내야 한다

갓 마흔살 녹두 전봉준이 일어선다

서마지기 논밭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던 글방샌님 전봉준

동네 아이들 네댓 가르치고

무덤자리 골라주며 끼니를 이어가던

외톨배기 전봉준

남들 보기에는 그러했겠지만

사실은 녹두만큼 작은 덩치속에

해를 하나 품고 있었다

새 세상을 껴안고 있었다

백성들이 주인인 나라

백성들이 하늘 대접을 받는 나라

배달의 자손끼리 오손도손

깨를 쏟으며 사는 나라

전봉준은 새 나라의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그는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어둠속을 헤매이며 빛을 모으고 있었다

동학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1893년 계사년 음3월 초열흘은

동학창시자 최제우의 스물아홉번째 제삿날이다

2대 교주 최시형은 이 날을 맞아

보은 속리산자락 장내 마을에

전국 동학교도들을 집결시키라는

통유문을 팔도 각읍 접주들에게 내린다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재앙이

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척왜양창의」

­왜놈과 양놈을 물리치려고 대의로 일어선다

드높이 올린 깃발아래

2만을 헤아리는 교도들이 팔도에서 몰려든다

충의대접주 손병희 충경대접주 임규호 청의대접주 손천민 금구대접주 김덕명 정읍대접주 손화중…

보은 장내 집회가 있은지 열달

전봉준은 어둠속에서 불씨를 피우고 있었다

정읍,금구,부안,태인을 오가며

곳곳에 불씨를 묻어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894년 갑오년 음 정월

마침내 횃불에 불을 붙일 날은 밝아오고 있었다.

◎보은집회는 고부봉기의 “전야제”/사회변혁 시도한 세력의 애타는 몸짓/사상적 구심점 잃은 민중의 호응받아/보은에서 고부까지 약사

한국사에서 19세기는 조선왕조가 해체되는 시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통치기강은 해이해졌고 농촌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농민전쟁과 변란이 끊이지 않았고 전염병까지 기승을 부렸다.여기에 이양선이라는 외국배들은 협박에 가까운 통상요구와 함께 약탈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즈음 중국은 아편전쟁의 패배로 동아시아의 종주국으로서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급기야 186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돼 황제가 피란을 떠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 조선시대의 지배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은 이미 설득력을 잃고 있었다.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실학도 역부족이었다.그러자 기층사회에는 정감록같은 도참사상과 후천개벽설이 구석구석 퍼져나가 술렁거렸다.

수운 최제우는 이러한 시대 상황속에 대응책을 구하고 나선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동학은 유교적 세계관에서 출발하여 서학의 충격을 받아들이고 민중사상의 다양한 요소를 복합적으로 수용했다.그러나 최제우 당시 동학은 종교적 차원에 머물렀다.

그래서 동학혁명이란 곧 「사회변혁세력이 동학을 정치·사회운동으로 활용코자 했던 몸짓」으로 평가한다.19세기 변혁운동을 이어받고 있던 전봉준을 비롯한 남접계는 종교적 성격이 강했던 최시형의 북접계와는 달리 현실투쟁이 그 목표였다.전봉준계는 이를 위해 북접계를 끌어들여 남·북접이 연계되어 일본과 서구제국을 배척한다는 척왜양의 대중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충청도 보은군 장내에서 1893년3월 2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던 보은집회가 그것이다.북접이 남접의 뜻에 호응해「척왜양창의」를 내건 평화적 집회였다.그러나 같은 시간 전봉준의 남접계는 전라도 금구에서 따로 집회를 가졌다.보은의 교도들과 합세한뒤 제물포로 올라가 직접 위와 양을 몰아내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금구집회도 4월2일 보은집회가 해산되자 막을 내렸다.

1890년경 입교한 전봉준의 지도력으로는 역부족이었고 세력이 조직화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1893년4월 금구집회 해산에서부터 1894년2월 고부봉기까지는 바로 혁명의 기운을 결집하는 시기였던 것이다.<서동철기자>

◎혁명이 싹이 튼 땅/「척왜양창의」 깃발 흔적 간데없고/충북보은군 장내마을 가는길

충청북도 보은군 외속리면 장내리는 동학혁명의 전야제라 할만한 보은집회가 열렸던 곳이다.보은에서 상주가는 길을 따라 20분쯤 달리다보면 면사무소와 농협을 표지판으로 쉽게 찾을수 있는 전형적인 면소재지이다.

장내는 현재 1백50여호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한적한 시골마을로 요즈음의 지리감각으로는 왜 이곳에서 그같은 대규모 집회가 열렸는지를 이해하기가 쉽지않을 것이다.그러나 장내는 남으로는 영동,동으로는 상주,서로는 옥천·대전,북으로는 청주가 모두 1백여리 상간에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마을에서는 이제 서쪽의 옥녀봉과 동서를 가로지르는 삼가천을 경계로 농성하던 2만 동학교도들의 주문외는 소리와 「척왜양창의」를 내세운 깃발의 흔적은 찾을수 없다.다만 속리산 쪽을 향해 마을을 2백∼3백m쯤 벗어난 왼쪽 논 사이에 남아있는 동학교도들의 얕은 돌성만이 지나간 역사의 일단을 말해주고 있다.

동학혁명 이후에 지어지기는 했지만 마을을 가로지르는 삼가천 너머에 있는 선씨 문중 아흔아홉간 고옥은 옥녀봉과의 절묘한 구도로 찾는 이들의 감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1994-02-09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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