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일 관계(온가족이함께 읽는 우리역사: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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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3-10-22 00:00
입력 1993-10-22 00:00
우리의 고대사에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부분 가운데 하나가 삼국과 위의 관계이다.삼국과 가야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왜와 정치적·문화적으로 밀접한 접촉이 있었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 실체는 오랫동안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채 한·일양국(또는 양국의 사학자들)은 각기 자국에 유리한 쪽으로만 한일 고대사를 해석해왔다.좀더 엄밀하게 말하면 근대 역사학을 먼저 도입한 일본측이 적극적으로,또 공격적으로 고대사를 왜곡한 반면 국내 사학계는 방어에 급급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야마토(대화)조정이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에 식민통치기구인 임나일본부를 설치,백제·신라·가야를 2백년 가까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일본측이 내세운 대표적인 억지이론의 예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측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지난 79년부터 82·90년 3차례 개정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백제위관계」에 대한 서술 변화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 가운데 82년판과 90년판이 큰 차이를 보인 점은 유의할만한 사항이다.
79년판에는 『4세기 중엽 백제가 남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고대 무역국가로 발전』(19쪽)했으나 고구려가 북중국의 전진및 신라와 연맹해 압력을 가하자 백제도 남중국의 동진,바다건너 왜와 연결해 이에 대항하였다』(23쪽)고 밝혔다.이후 『한반도안에서 고구려·신라가 협격하게 되자 백제가 일본 지역에 구축하였던 세력도 약화됐다』(25쪽)고 서술했다.
이에 비해 82년판 교과서에서는 『백제는 4세기 중엽 우세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산둥지방과 일본의 여러 지방에까지 진출하였다』(23쪽)고 써 양국의 관계를 대등한 관계라기 보다는 백제가 왜에 세력이 미쳤음을 표현했다.
90년판에는 훨씬 적극적인 표현들이 등장한다.
『백제는 수군을 증강시켜 중국의 요서지방으로 진출하고 이어서 산둥지방과 일본에까지 진출하는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였다』(38쪽)고 왜에의 진출을 부각시킨데 이어 『삼국중 왜와 가장 긴밀한관계를 유지했던 나라는 백제였다.이는 다수의 백제유민이 규슈지방등지에 진출하여 국가건설에 이바지하였기 때문이다』(41쪽)고 밝혀 백제가 일본 건국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같은 서술은 80년대 진행된 사학계의 연구성과를 일부 받아들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그러나 연구자들은 「이바지했다」라는 표현에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그들은 「백제 유민이 일본국을 직접 건설했다」고 보기 때문이다.<이용원기자>
1993-10-22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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