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의 막걸리(외언내언)
수정 1993-08-22 00:00
입력 1993-08-22 00:00
농촌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막걸리는 서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적어도 1960년대까지 탁주는 주류의 총아이고 제왕이었다.그런 위세로 해서 시골의 술도가,즉 양조장은 부의 상징이었고 엄청난 이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부터 소주와 맥주에 밀려난 탁주는 사양길로 접어든다.주당들의 입맛이 알코올 도수가 낮고 텁텁한 막걸리를 외면하고 도수도 높고 짜르르한 소주와 산뜻한 맛의 맥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이와함께 60년대초까지 이름을 날리던 명동의 대폿집 「은성」이나 청진동의 「열차집」에서 볼 수 있던 낭만도 사라져버렸다.
옛 영화를 되찾기위해 막걸리가 밀가루 대신 쌀로 빚어진 것은 1977년 12월.그러나 쌀막걸리도 도시화된 주당들의 기호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그렇게 된데에는 맛도 맛이려니와 보관이 어렵다는 결점이 큰 몫을 차지했던것 같다.
2년만에 중단된 쌀막걸리가 다시 시판되기 시작한 것은 90년 1월.좋은 쌀을 원료로 해 질을 높이고 플라스틱 신소재로 만든 용기를 사용했다.인천부터 판매가 시작된 쌀막걸리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한때는 품귀현상까지 빚을 정도였다.지금은 소강상태라곤 하지만 쌀막걸리 예찬론자들이 부쩍 늘어난건 사실이다.어느정도의 명예를 회복한 것이다.
그 막걸리가 지난달 최초로 미로스앤젤레스에 수출되어 7만2천통이 한달만에 동이 날 정도로 기세를 올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국땅에서도 고국의 미각은 잊을 수 없는것인가,막걸리를 마시며 향수에 젖는 교포들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1993-08-22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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