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쁨 「꽃봉지회」/박정자 연극배우(굄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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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3-07-23 00:00
입력 1993-07-23 00:00
90년 「대머리 여가수」공연으로 내가 받은 개런티는 50만원이었다.나는 할말이 없었다.나한테 미안할 정도였다.「돈」이 전부인 세상에서 연극배우는 사람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그때 비로소 생겼다(난 왜 그런 자각증상이 없었을까). 나는 히스테리를 느꼈다.견디기가 굴욕스럽기까지 했다.그리고 더이상 연극을 해야 할 이유를 그때 구체적으로 상실했다.그래,나는 언제나 늦되었지.연극을 30년 가까이 해왔으니 그 많은 시간과 열정을 다른데 투자했다면 내가 아무리 멍청이래도 지금보다는 부자가 됐을텐데.그렇게 한심하게 자조하며.
그래도 나는 연극표를 팔았다.코너에 몰린 내 자존심 때문이었다.중년여자들의 소극성,나이가 주는 권태를 나는 안다.그들을 부르고 싶었다.나의 분투를 본 둘째언니와 친구들이 표를 사주기 시작했다.주변에도 권하며.연극배우 박정자를 후원하는 모임 「꽃봉지회」는 그렇게 만들어졌다.91년이었다.우선 17명의 회원이 생겼고 다시 150명으로 늘어났다.전문직을 가진 사람도 있고 주부도 있다.그들은 공연 때마다 극장에 와 내 무대를 지켜보며 연극이라는 하나의 진실에 참여한다.
나는 부자가 된 것 같았다.누가 연극을 와서 봐주기나 할까.미리 불안하고 미리 허무하던 나는 확보된 관객이 생긴것이 아무 공덕도 없이 그들을 갖게 된 것이 진정 기뻤다.꽃봉지회 회비로 회원들에게 표를 보낼 땐 나만 아는 기쁨을 감추기 힘들었다.언제나 나는 표를 보낼 대상이 없어 막연했었으니까.
나는 잃어버렸던 그 이유를 꽃봉지회를 통해 다시 찾고 있다.그건 모골이 송연할 만큼의 긴장,게으름 부릴 수 없다는 투정,연극배우로서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나의 뺏길수 없는 기쁨인 채로.
1993-07-23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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