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신문을 생각하며(사설)
수정 1991-04-05 00:00
입력 1991-04-05 00:00
냉동차 속 같은 억압의 시대에도 느낄 수 없었던 부끄러움에 자탄하면서 빈축당하고,난타당하고 질책당하는 응징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신문의 날을 맞고 있다.
밖으로부터 가해오는 응징은 오히려 견디기 낫다. 더욱 혹독한 것은 안으로부터 치솟는 자기혐오다. 홍수진 오염의 강을 향해 목소리 가다듬어 꾸짖기나 하는 것으로 자기역할을 과시해오던 「신문」은 그가 디디고 선 발 밑의 강둑이,같은 오염의 물로 무너져내리고 있음을,절박한 지경에서 자각하고 있다.
편집인협회가 정한 올해 신문의 날 표어는 「자정으로 신뢰회복,자율로 책임완수」다. 지난해의 표어 역시 「책임있는 신문,신뢰받는 신문」이었다. 신문이 조금도 신뢰받지 못하고 있고,그 까닭은 신문이 맡은 바 그 사명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책임 때문이라는 것을,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표어에 담아 자기각성하는 데 활용하자는 뜻이다.
그래도 지난해에는 올해 같은 적나라한 부끄러움을 동반한 것은 아니었다. 오랫 동안 유보되었던 자유와 활기가 느닷없이 찾아온 해빙 때문에 불순물의 침윤을 받게 된 것이라는 핑계가 허락되는 「책임의 통감」이었고 신뢰회복에 대한 자신도 있었다.
사이비언론의 발호는 거의 필연적인 부작용으로 예측되었었고 시대의 성숙에 따라 자연도태되고 말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올해에 이르러 「신문」은 스스로의 도덕적 불건강에 현기증 나는 자각을 해야 했다.
핑계댈 외세도 없고,기대어 떼를 쓸 지주도 없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자정해야 하고 그 힘으로 자율력을 키워 신뢰를 회복해야 살아남을 터전을 늘려갈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과 직면한 셈이다.
구호나 강령의 기치만을 높이 쳐들고 「신문의 날」 하루,신문주간 한 주일을 통과의례로 치러낸다고 해서 실오라기만한 허물도 탕감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선구자적인 지식인투사역에만 연연하여 변화하는 시대와,폭주하는 새로운 지식에 문맹한 집단으로 전락하는 어리석음에서도 각성해야 하고 가치와 규범이 극심하게 혼미를 겪는 방향 잃은 현실에서 그나마 최소한의 방향타를 지킬 구실이 「신문」에 주어져 있음도 깨달아야 한다.
신문인이 역사를 이끄는 향도적 존재이고,구국지사라고 자처하는 일은 시대착오적인 과대망상일 수도 있지만 건강하지 못한 신문이 사회에 끼치는 절망적인 영향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한다.
범람하는 오염의 강에 휩쓸려 괴사에 이른 부패세포가 한줌쯤 있기는 하지만 신문의 중추가 자정불능하게 비관적인 것은 아니다. 스스로 살아남기 위하여 환경공해에서 자정력을 키우듯,신문도 살아숨쉬기 위하여 자정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 신문도 알고 있다. 그리고 능력있고 성숙하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야 미래에까지 살아남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올해의 「신문의 날」이 그렇게 거듭나는 전환지점이 되게 할 것을 다짐한다.
1991-04-05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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