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북신청 노인의 설레임/오승호 사회부기자(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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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0-08-05 00:00
입력 1990-08-05 00:00
◎“이번만은 꼭”… 마음은 벌써 북녘에

『북한에 있는 노부모와 네자녀를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왔습니다』

북한방문 신청을 받기 시작한 첫날인 4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 관악구청 4층 대강당. 무더위에 비지땀을 흘리며 관련서류를 넣은 손가방과 부채를 들고 북에 두고온 가족들을 만날 꿈을 안은채 차례를 기다리는 김성탁씨(69ㆍ관악구 봉천동 산133의15)는 희끗희끗한 머리와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에 눈물을 글썽였다.

김씨가 부모와 어린 4남매를 북에 두고 혼자 남쪽으로 내려온 것은 6ㆍ25다음해인 51년 1ㆍ4후퇴때였다. 이때 김씨는 30세였다.

고향인 평안남도 안주군 운곡면 용천리에서 당시 10살이던 장녀와 7세ㆍ5세ㆍ3세였던 4남매 및 환갑을 넘긴 노부모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살고 있던 김씨는 1ㆍ4후퇴하루 전날 무슨 장사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보기 위해 혼자 고향을 떠나 평양으로 나섰다. 김씨는 그러나 평양에 도착한 다음날 중공군이 갑자기 물밀듯이 밀어닥치는 바람에 고향에 남아있던 가족들에게 연락할 겨를도 없이 피난민들속에 묻혀 남쪽으로 내려왔다. 하루에 50리씩 20여일을 꼬박 걸어 서울에 도착한 김씨는 영등포역에서 피난민들과 함께 군용열차 지붕위에서 3일간을 보낸뒤 안동이 고향이며 일제때 징용돼 진남포제련소에서 일하는 한 피난민을 따라 안동으로 내려갔다.

안동에 다다른 김씨는 6개월동안 땔나무 등을 해주며 남의 집에 얹혀살다 독립하기 위해 공주등지를 돌아다니며 목공일을 배웠다.

『군용열차 위에서 3일을 머무는 동안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서로 비벼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김씨는 이같은 이산의 아픔말고도 또다른 비운을 겪었다고 했다. 6ㆍ25사변이 일어나 기전 강제로 평양부근에 있는 인민군내무소(경찰서)에서 3년동안 일했다는 것이 피난내려온 뒤 뒤늦게 밝혀져 공주교도소에서 3년을 복역하는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7ㆍ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을 당시에도 당장 통일이 돼 이북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만나볼 수 있으리라는 감격에 젖어 한동안 잠을 설쳤었다』고 회상한 김씨는 『이번에도 혹시 북한측의 거부로 고향방문의 꿈이 무산되면 또 어떻게 기다리나… 』는 걱정을 하면서도 벌써 마음만은 마냥 북의 고향에 가있는 듯했다.
1990-08-05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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