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눔] 과잉진단 남발 ‘1주’차로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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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혜 기자
수정 2005-10-08 10:24
입력 2005-10-08 00:00

스치기만 해도 ‘3주 중상’… “벌점기준 재검토” 주장도

이승희(31·여·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씨는 지난달 차를 몰고 집에 가다가 갑자기 끼어든 승합차에 살짝 받혔다. 가벼운 사고여서 부상은 경미했다. 어깨에 약간의 타박상을 입었을 뿐 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입원을 하라.”며 전치 3주짜리 진단서를 끊어줬다. 이씨는 몸에 큰 이상이 없었는데도 1주일 동안 입원해 물리치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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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씨가 벌점부과 기준상 ‘중상’에 해당하는 전치 3주의 진단을 받는 통에 사고를 낸 운전자는 벌점누적으로 면허가 취소됐다. 이씨는 “병원측에서 보험금을 많이 받으려면 가해자가 진단일수를 줄여달라고 부탁해도 절대 들어줘선 안된다고 했다.”고 말했다.

택시기사 김모(40)씨는 지난 8월 서울 송파구 잠실역에서 승객 2명을 태우고 강남역으로 가다 뒤에서 오던 화물차와 부딪혔다. 차선을 갑자기 바꾼 김씨의 과실이었다. 승객과 화물차 운전자 등 3명 모두 요추염좌 등으로 전치 3주 진단을 받았다. 결국 김씨는 한꺼번에 벌점을 45점이나 받아 면허가 정지됐고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김씨는 “골절도 아니고 멍 하나 없이 가볍게 근육이 놀란 상태를 중상으로 보는 것은 심하다.”고 하소연했다.

교통사고 가해자에게 벌점을 물릴 때 잣대가 되는 ‘중상’과 ‘경상’의 기준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사고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하지만 병원들의 농간과 일부 피해자의 비양심적 행동 때문에 지나치게 가혹한 제재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게 주장의 핵심이다.

교통사고를 내면 ‘운전면허 행정처분 처리지침’에 따라 벌점이 부과된다. 전치 2주까지는 경상이고 3주 이상부터 중상으로 분류된다. 경상이면 피해자 1명당 벌점이 5점이지만 중상이면 3배인 15점으로 늘어난다.

벌점이 40점 이상이면 40일간 면허가 정지되고 1년간 누적벌점이 121점 이상이면 면허가 취소된다.

문제는 의사들의 진단서 발급이 투명하지 못하다는 것. 서울에서 10년 이상 정형외과를 운영해온 의사 이모(42)씨는 “전치 3주가 되면 입원이 쉬워 병원 입장에서 이득”이라면서 “골절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 최대한 끊어줄 수 있는 3주짜리 진단을 발급하는 때가 많다.”고 털어놨다.

서울시내 경찰서 교통과 관계자는 “사고가 나면 스치기만 해도 전치 3주는 기본”이라면서 “생계를 위해 반드시 차를 몰아야 하는데도 억울하게 면허가 정지되는 안타까운 사례를 자주 보게 된다.”고 전했다. 그는 “현행 기준은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할 가능성이 큰 만큼 골절상으로 인정되는 전치 4주 정도로 중상의 기준을 높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상 기준의 상향조정은 운전자들의 경각심을 약화시켜 더 많은 교통사고를 유발할 것이라는 시각도 만만찮다. 시민교통안전협회 김기복 대표는 “사고를 내도 보험처리만 하면 된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는 상태에서 벌점부과 기준마저 완화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면서 “생계형 운전자에 대한 배려라는 명분도 개인의 생명권과 사고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라는 명제 앞에서는 설득력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처벌규정 완화보다 진단서 발급 과정에서 의사들의 도덕적 해이를 바로잡을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2005-10-08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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