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정 업그레이드](하)쪽방촌, 첨단도시로 거듭난다
류찬희 기자
수정 2008-03-07 00:00
입력 2008-03-07 00:00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125 일대.1960∼70년대 한국 수출산업의 중추 기지로 구로공단의 배후도시였다. 구로공단은 2002년 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이 바뀌면서 첨단 빌딩들이 들어서고 있지만 주변 주거지역은 여전히 60,70년대 수준이다. 낡은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선 서울의 대표적인 쪽방촌이다. 골목길은 승용차 한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비좁다.
이른 아침 근로자들이 쏟아져나오면서 골목길은 금방 꽉 찬다.‘작은 골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고 있을까.’ 하는 의문은 집에 들어가면 금방 사라진다. 다닥다닥 붙은 집은 많은 사람을 들이기 위해 방을 작게 나눴다. 한 집에 10가구 이상 살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재개발을 추진했다. 면적이 28만 5000㎡에 이르는 대규모 사업이다. 그래서 블록을 4개로 나눠 추진했다. 무려 5000여가구에 이른다. 이 중 주택 소유자는 1700여가구이다. 나머지는 세입자 가구다. 구역이 넓고 주민 이해관계도 얽히고설켰다. 사업이 오랫동안 제자리를 맴돌았지만 전체를 이끄는 전문가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주택 위주의 재개발사업은 규모가 아무리 크더라도 주변 도시 인프라 구축에는 신경쓰지 않는다. 단지내 편익시설만 설치하면 그만이라서 사업성도 높다. 주거개선 위주의 뉴타운사업은 규모가 크더라도 사업성이 뛰어나 민간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뛰어든다.
그러나 가리봉 일대는 주거와 업무·상업 시설을 동시에 개발해야 하는 데다 블록간 이익 배분 등도 복잡하다. 도시 인프라와 편익시설 투자는 블록별 조합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더욱이 업무·상업시설로 개발하는 곳은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민간기업이 사업참여를 꺼리고 있다. 재개발을 추진하더라도 반쪽짜리 사업에 그칠 공산이 크다.
지지부진한 사업에 불을 댕긴 기관은 대한주택공사였다. 주공의 역할은 도시계획 차원의 큰 그림을 그리고 갈등을 해결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주공은 사업을 추진하면서 부족한 녹지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남부순환도로 1㎞를 지하로 묻고 그 위에는 공원을 만들 방침이다. 만약 4개 블록별로 사업이 추진된다면 이 같은 사업은 추진하기 어렵다.
주민 대표회의 정문식 감사는 “복합개발방식이라서 민간이 추진하기는 어려운 곳이었다.”며 “인·허가, 주민 갈등 조정, 인프라 구축 등을 위해 주공을 사업 시행사로 선정했다.”고 말했다.
주공은 구로구와 함께 4개 블록을 하나의 사업지구로 묶어 추진키로 방향을 세웠다. 지역 특성에 맞춰 2개 블록은 공동주택단지로,2개 블록은 주택과 함께 업무·상업 지역으로 개발하는 마스터플랜도 내놨다. 사업비가 2조원대에 이른다.
그렇다고 주공이 4개 블록 사업을 독차지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전체 사업 조율과 단지 기반시설 설치 등은 주공이 책임지고 민간이 잘하는 것은 민간에 맡긴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다. 개별 블록은 민간자본을 유치키로 하고 설명회까지 열었다.
주공은 사업 방향을 미래형 첨단도시로 잡았다. 공동주택 5000여가구와 상업·업무시설이 들어선다. 최고 60층짜리 초고층 빌딩과 20∼30층 주상복합 아파트도 짓는다. 백화점·컨벤션센터·멀티플렉스 등도 건립된다. 첨단기업들이 많이 입주한 디지털 1·2·3단지와 연계해 서울 서남부 디지털 비즈니스 시티로 개발하는 것이다.
5∼6월 도시정비계획을 변경하고 연말쯤 설계·시공사를 선정할 방침이다. 이르면 내년 상반기 사업시행인가를 받을 계획이다. 사업시행인가 이후 아파트를 분양하면 2011년쯤 입주할 수 있다. 임대 아파트 1000여가구도 건립, 기존 세입자들에게 우선 공급한다.
도시마다 가리봉동과 비슷한 지역이 많다. 서울에는 홍제동 유진상가 주변, 청량리 역세권, 마포 합정동 먹자골목 주변 등이다. 인천 가좌동, 부천, 대전 등의 기존 도심지는 도시 확산과 함께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도시 형성이 오래돼 기반시설이 턱없이 부족하고 인구가 빠져나가는 등 상대적인 낙후지역으로 변해 재정비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사업 추진은 아직 초보단계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윤병천 주공 도시재생사업 이사
윤병천 대한주택공사 도시재생사업 이사는 6일 “도시재생 사업은 작은 규모의 주택 재개발 사업과 달리 복잡하고 주민 이해관계가 복잡하다.”며 “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서는 투명하고 공정한 사업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존 재개발·재건축사업 컨설팅은 행정 업무를 대행해주는 역할에 그치고 있으며, 과열 수주전과 온갖 비리의 온상이 되고 있다.”며 공공 전문 기관의 역할을 강조했다.
주공이 재개발 등 도시재생 사업에 참여하는 취지는 민간과 경쟁하기보다는 시장의 투명성 확보, 리스크(위험)가 큰 도시정비사업의 위험 요인을 사전에 없애 조합원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윤 이사는 “도시재생사업 시장에 주공의 역할이 커지고 있지만 참여 비율은 2%에 불과하다.”며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공이 사업자 지정을 받기 위해서는 주민의 3분의2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조합방식처럼 추진위를 구성할 수 없다.”며 “일반 조합이 정비구역지정 전부터 추진위를 구성하듯이 주공도 이런 활동을 할 수 있게 길을 터야 한다.”고 말했다.
또 “총괄사업관리자로 참여해 궂은 일을 도맡아 처리해주고도 직원의 인건비 정도만 받고 있다.”며 “사업 추진 절차를 간소화하고 주민 투표에 의한 시공사 선정도 조합 방식에서 적용하는 시공사 선정기준을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 이사는 “공공기관의 도시재생사업으로 민간 부문의 역할이 축소된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며 “공공기관이 전체 그림을 그리고 민간부문은 개별 사업을 맡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총괄사업관리자’란
복잡한 도시정비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컨트롤하는 믿음직한 기관이 필요하다. 재정비촉진사업법에 따라 이를 대행하는 기관이 ‘총괄사업관리자’다.
개별 조합에서 하기 어려운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기관이라고 보면 된다. 시장·군수를 대행해 재정비촉진계획을 수립 지원하고 사업을 총괄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기반시설 설치 및 계획 자문, 기반시설 비용 분담금·지원금 등을 관리하는 일도 맡는다. 지역 주민 의견을 수렴하고 관공서와 민간 업체의 가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사업이 부진한 곳에서는 시행사로 나서기도 한다.
총괄사업관리자가 개별 사업을 시행하는 경우는 재정비계획 결정·고시 이후 2년 이내에 조합설립인가를 받지 못하거나 3년 이내에 사업승인인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다. 토지·건축물 소유주 과반수가 공공기관을 사업시행사로 고르는 경우도 해당한다. 총괄사업관리자는 사업 추진이 부진하거나 문제가 많은 곳의 정비사업을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인 셈이다.
총괄사업관리자로 지정받기 위해서는 도시 재정비 노하우가 풍부하고 도시계획·건축·개발·시공 전문가를 충분히 확보해야 가능하다. 도시재생 사업을 투명하고 안전하게 이끌 수 있는 자격을 갖춰야 한다.
주택공사는 현재 부천 소사·고강지구, 부산 시민공원주변 등 전국 10개 지구에서 총괄사업관리자로 지정받았다. 올해도 7개시 10개 지구에서 추가 총괄사업관리자로 지정받을 계획이다.
총괄사업관리자를 지정하면 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 개발 속도가 빨라지고 투명하게 진행할 수 있다. 사업 초기 자금 확보가 쉽고 공공기관이 추진하다보니 주민들이 믿고 따르며 사업 인지도도 올라간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2008-03-07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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