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일흔넘어 식당 연 ‘헤어디자이너계 대모’ 그레이스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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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4-11-09 00:00
입력 2004-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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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리
그레이스 리 그레이스 리
‘단발머리’ 바람 일으킨 유학파 1호

한국 헤어디자이너계의 대모(代母) 그레이스 리(73)가 요리사 겸 식당주인으로 변신했다. 더욱이 서울도 아닌 남도의 항구, 통영으로 옮겨 새롭게 시작했다. 일흔을 넘긴 할머니로서 ‘왕년의 영화’에 묻히지 않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젊은 사람도 쉽지 않은 도전이다. 시작하기에 늦은 때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 보인 것일까.

그는 경남 통영에 낚시차 내려왔다가 풍광에 반해 다음날 덜컥 머물 곳을 구했다.“입에 맞는 음식점을 못찾아서 식당을 열었습니다.”종심(從心)의 나이에 맞게 마음가는 대로 한 것이리라. 개업한 지 11개월 남짓한 그의 ‘중화요리 이선생’은 한결같은 맛으로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아무런 연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볼거리 많은 통영에서도 ‘명소’ 반열에 들어섰다.

“공기가 좋고요, 물이 좋고요, 놀이터(그의 중식당)가 즐겁습니다.”통영에서의 생활이 너무 즐겁단다. 이런 까닭일까,3년전에 받은 유방암 수술의 어두운 그림자는 찾을 수 없다. 그의 얼굴은 요란한 화장없이도 화사하고 목소리는 아주 맑았다. 헤어스타일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단발머리.

일흔을 넘긴 할머니가 꼬박꼬박 붙이는 존댓말이 부담스러워 말씀을 낮출 것을 당부했다. 그랬더니 “반말투로 말하는 것이 싫어요.‘늙은이 티’내는 것 같아서요.”라며 말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는 어색하지 않았다.

그레이스 리는 70∼80년대 멋쟁이들 사이에서 헤어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렸다. 유학파 1호 헤어디자이너인 그는 단발머리로 선풍을 일으켰고, 개인용 헤어드라이어를 소개한 주인공이다.

겉치장은 안해도 먹는 덴 아끼지 않아

그는 세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로서 서른다섯에 이혼한 후 1967년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미용 기술을 배웠다. 마흔을 앞둔 나이에 미용실 청소와 머리 감기기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폴 미첼 등 세계적인 헤어디자이너들과 교우하며 최고의 헤어디자이너로 인정받았다. 유명 패션잡지 ‘보그’에 국내 최초로 게재된 미용인이다.79년 미용계에 이바지한 공로로 석탑산업훈장도 받았다.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딴 그레이스 리 커트대회가 해마다 두차례씩 열린다.

그의 지인들은 커트 솜씨보다 미각을 더 높이 쳐준다. 그래서 그가 음식점을 운영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란다. 인터뷰하는 날 마침, 미국 뉴욕에 사는 막내딸 김승화(47)씨가 와 있었다.3년 만의 모녀 재회란다.“어머니는 액세서리와 겉치장은 안하지만 먹는 데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고 거들었다. 그 흔한(?) 보석 하나 밍크 코트 한 벌이 없단다.

그레이스 리는 “이 배 안에 빌딩이 몇 채 들어 앉았어요.”라며 배를 두들겼다.“밥은 밥맛이 나야 밥이다.”고 강조하는 그의 음식론은 일견 평범한듯 보이지만 쉽지 않다.

그의 식도락은 70년 세월을 지나왔다. 어릴 적부터 미식가였던 부친을 따라 ‘맛있는 음식점’을 순례했단다.“세계를 돌아 다니면서 안먹어본 음식이 없어요.”그래도 식도락은 계속됐다. 일흔이 된 2001년 그는 연대 어학당에 등록했다.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한 그였지만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서였다.“중국에 갔을 때 중국 음식을 제대로 주문하기 위해서 공부했죠. 벽마다 중국어를 써붙여 외웠지요.”그런 인연으로 중식당까지 냈다.

그가 통영에 새 둥지를 틀었지만 당일치기 행동반경은 대전까지다. 젊은이 못지않은 보폭이다. 이유는 지방의 숨은 맛집을 찾아내는 것. 맛 있다고 소문이 나면 꼭 찾아 먹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식도락가다.

눈 나빠져 책 못 읽게 될까 걱정

그에게 빗과 가위를 놓았느냐고 물어 봤다.“영원히 현역이에요, 요즘도 서울에 한 달에 한번꼴로 올라가는데 직접 가위를 듭니다. 내가 안 자르면 ‘머리를 길러 묶겠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고맙지요. 지금도 빗과 가위만 들면 세계 어디서든 밥먹고 살 수 있습니다.”라며 건재를 과시했다. 그러나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법. 그는 근사하고 깨끗하게 늙어 즐겁게 죽는 것을 꿈꾼다. 나이가 들면서 걱정이 하나.“책을 닥치는 대로 읽는 편인데 눈이 나빠질까봐 가장 걱정이에요. 재미난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 못 읽는다면 얼마나 약 오르겠어요.”

가족들에게 유언도 남겼다. 일부를 들려줬는데 익살스럽기까지하다. 장례식에 쓸 꽃은 흰색이 아니라 빨간색 꽃이면 좋겠단다.“이왕이면 빨간 장미가 좋고, 음악도 평소에 즐겨 듣던 것을 틀고, 그런데 메뉴는 짜두지 못했어요.”열정적인 그의 에너지 탓에 유언은 남의 이야기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하고 싶은 일은 즐겁게 한다.”는 그레이스 리. 통영 앞바다에서 갓 잡은 활어처럼 퍼득거리는 그에게서 일흔셋은 그저 숫자일 뿐이다.

통영 글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그레이스 리 프로필

▲1951년 이화여고 졸업 ▲1967년 도미, 뉴욕의 월프레드 아카데미(미용전문학교) 수료 ▲1968년 뉴욕의 헨리벤델 졸업, 세계적인 미용사 폴 미첼에게서 6년간 사사 ▲1973년 서울 도큐호텔에서 도큐 그레이스리 미용실 창업 ▲1976년 폴 미첼-그레이스리 조인트 헤어쇼를 개최, 패션잡지 보그에 작품 소개 ▲1979년 아일랜드 국제기능올림픽 미용부문 심사위원, 석탑산업훈장 수상 ▲1990년 그레이스리 커팅클럽 발족 ▲1992년 제1회 그레이스리 커트대회 개최
2004-11-09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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