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면 갈 수 없는… 유령들의 송년 파티

오경진 기자
수정 2026-09-04 01:04
입력 2026-09-04 01:04
유령들/세사르 아이라 지음/엄지영 옮김/문학동네/212쪽/1만 5000원
분명히 있지만 볼 수 없는 그들지나간 것과 다가올 것의 경계선
아무것도 아니라 자유로운 유령
예측할 수 없는 즐거움이 쏟아져
‘유령’은 존재하는가. 유령은 존재와 비(非)존재 사이에서 부유하는 무언가를 의미한다. ‘있음’과 ‘없음’의 틈바구니에서 유령의 실존은 무한히 미끄러진다. 유령의 현존을 느끼려는 자는 결단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삶이 아닌 곳’에 내던져야 한다.
아르헨티나 소설가 세사르 아이라(77)의 장편 ‘유령들’은 현실과 환상, 형이상학과 물리학이 어지럽게 혼재해 있는 소설이다. 마치 누군가의 꿈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인 아이라는 국내에는 최근에서야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라틴아메리카 문단에서는 이미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 적 있는 거장이다. 소설뿐만 아니라 번역과 비평 분야에서도 활약하는 타고난 글쟁이다. ‘유령들’은 아이라의 대표작으로 한국어로 소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가난한 자들과 부유한 자들, 인간과 짐승의 경계는 임시로 그어놓은 선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이 얼마 지나면 저곳에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31일이라는 날짜는 그 자체가 지닌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을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11쪽)
12월 31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공사 중인 아파트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파트가 완공되면 입주하기로 예정된 소유주들이 찾아온다. 건설 현장인 이곳은 아주 정신이 없다. 인부들은 일하느라 여념이 없고 아이들은 미친 듯이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아파트가 다 지어졌을 때 이곳에서는 어떤 행복한 미래가 펼쳐질까. 건물 꼭대기 층에는 경비원 숙소가 있는데 그곳엔 칠레 출신 이민자인 야간경비원 라울 비냐스 가족이 살고 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라울은 형제들을 초대해 가족과 함께 오붓한 저녁 식사를 계획하고 있다.
소설에서 ‘12월 31일’과 ‘공사 중인 아파트’라는 시공간적 배경은 매우 중요한 상징이다. 12월 31일은 ‘지난해’와 ‘새해’를 가르는 분수령이다. ‘이미 지나간 것’과 ‘앞으로 다가올 것’의 경계에 관해 묘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위에서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서 있는가.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갈 때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공사 중인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다 지어지지 않았기에 그것은 아직 아파트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곳을 아무것도 없는 공터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12월 31일과 공사 중인 아파트 모두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 놓여 있다. 마치 유령처럼.
“애초에 건축이란 이미 지어진 것과 앞으로 지어질 것이 거울처럼 서로를 비춰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처럼 이 둘을 비춰주는 거울, 다시 말해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은 제3의 항으로, 이는 모든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아직-만들어지지-않은-것이었다.”(79쪽)
제목에서 대놓고 암시되듯 소설에는 아주 기이한 존재들, 유령들이 등장한다. 벌거벗은 몸으로 공사 현장을 활보하며 우스꽝스럽게 난동을 부리는 이들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다. 분명히 ‘있지만’ 현실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이들의 존재를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그러나 유령에게 매혹되는 이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큰딸 파트리다. 파트리는 아무것도 ‘아니라서’ 자유로운 유령들에게 이끌린다. 파트리는 유령들의 송년 파티에 초대된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 파티에 가기 위해 파트리는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거부할 수 없는 유령들의 제안을 받은 파트리의 영혼은 이렇게 소리친다.
“제발 가지 마요! 그녀는 영원토록 이런 모습으로 그들을 보고 싶었다. 비록 영원이 단 한 순간에 불과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단 한 순간이기에 더더욱. … 오라, 영원이여! 와서 내 삶의 순간이 되어다오!”(141쪽)
오경진 기자
세줄 요약
- 세사르 아이라 대표작 ‘유령들’ 국내 첫 소개
- 12월 31일 공사 중 아파트, 경계의 무대
- 존재·비존재 사이 유령들의 송년 파티 초대
2026-09-0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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