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백할 때까지 주리를 틀어라? 국왕 형벌에 제동 건 ‘조선 여론’

  • 기사 소리로 듣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공유하기
  • 댓글
    0
유용하 기자
유용하 기자
수정 2026-03-15 23:54
입력 2026-03-15 23:54

정진혁 박사, 당대 형사 행정 추적
압슬·낙인 등 악형, 관료·민간 반발
영조 이후 법 규정 따른 신문 전환

이미지 확대
19세기 말~20세기 초 활동했던 화가 기산 김준근의 ‘기산풍속도첩’ 중 가새주리트는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19세기 말~20세기 초 활동했던 화가 기산 김준근의 ‘기산풍속도첩’ 중 가새주리트는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1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돌풍을 이어가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 복위를 추진하다 체포된 신하들의 주리를 트는 고문을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죄인의 다리를 묶은 뒤 그 사이에 굵은 막대기(주릿대) 두 개를 끼워 가위처럼 비트는 ‘주리틀기’는 사극 영화나 드라마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고문 방식이다.

조선시대 법제사를 연구하는 정진혁 박사는 최근 펴낸 학술서 ‘조선 후기 형정개혁과 추국’에서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조선의 중앙집권적 통치구조에서 추국(推鞠, 의금부가 임금의 특명에 따라 중죄인을 신문하던 일), 결안(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의 형 확정 절차)과 같은 형사행정(형정)의 구조와 변화과정을 추적했다.

정 박사는 조선 후기 중죄인의 조사·판결서를 모은 책인 ‘추안급국안’에 실린 형사 정보와 개인 정보를 모두 계량화해 조선 후기 사법개혁 추진 배경과 진행 과정을 살펴봤다. 1601년(선조 34년)부터 1892년(고종 29년)까지 300년 정도의 각종 사건을 전수조사한 셈이다.

저자에 따르면 숙종 대에는 경신·기사·갑술환국, 영조 대에는 이인좌의 난, 정조 대에는 정유역변(정조 시해 미수 사건)이 형정 운영의 변곡점이 됐다. 형정 개혁을 둘러싸고 왕권과 신권이 충돌하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권력이 국왕에 집중되던 숙종 때도 민간의 여론이 형사제도에 영향을 미친 장면은 눈길을 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 폐비 반대 상소를 주도했던 박태보에게 법외 악형인 압슬형(무릎을 짓이기는 형벌)과 낙형(쇠붙이로 지지는 형벌)을 가해 결국 물고(고문치사)시킨 사건은 부정적 여론을 일으켜 이후 숙종이 사망할 때까지 악형이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국왕의 형사법 남용을 관료와 민간 여론이 제약한 대표적 사례라고 정 박사는 설명했다.



압슬형이나 낙형 같은 악형은 자백 유도 효과는 높았지만 부작용도 상승했다. 이 때문에 영조 이후에는 법외 악형은 완전히 소멸되는 상황이었고, 법적 규정에 의한 고신으로 전환됐다. 이에 대해 정 박사는 ‘국왕이 직접 수사하고 피의자가 직접 자백한다’는 도덕적 제약에서 벗어나 ‘하위 사법 기관이 수사하고 국가가 증거를 종합해 판결한다’는 효율적 측면으로 전환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용하 전문기자
2026-03-16 18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Q.
기사를 다 읽으셨나요? AI 퀴즈로 핵심 점검!
박태보 고문치사 사건이 조선 형정에 미친 영향은?
에디터 추천 인기 기사
많이 본 뉴스
원본 이미지입니다.
손가락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확대해 보세요.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