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는 콘텐츠 산업의 세계적 성공과 더불어 관광, 뷰티, 식품, 패션 등 한류 유관 산업으로 확장된 놀라운 성장과 성공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드라마 속 PPL의 흑역사조차 한국 상품이 세계시장에서 존재감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K팝 아이돌 셀러브리티들은 글로벌 브랜드 전략의 핵심 카드가 되었다.
그러나 성공의 외피를 벗기면 심각한 위기의 모습이 펼쳐진다. 한류 위기론은 한류의 성공이 보고된 이후 꾸준히 제기돼 왔다. 그동안의 위기설이 ‘사드’와 같은 외적 임팩트나 수출 증가 곡선의 완화와 같은 것이었다면 현재의 위기는 구조적이고 내적이라는 점, 그래서 장기적일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걱정스럽다. 스토리 산업은 넷플릭스로 인한 제작비 증가와 제작 편수의 극적 감소 앞에서 산업 내 빈부격차 확대와 일자리 감소라는 악순환 속에 있다. K팝은 당장의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혐한 문제와 해외 수많은 로컬 버전들과의 경쟁에 임해야 한다. 그리고 창의 산업에는 근본적으로 재능 있는 청년 인구의 충분한 수혈이 필요한데, 대한민국은 인구 감소라는 절대적 악조건에 직면해 있다.
한류라는 세계사에서 전례 없는 문화적 돌출이 정부 덕은 아니지만, 그간 정부의 관심과 지원은 제작비 부족에 허덕이는 국내 창작 시스템을 독려하는 역할을 해 왔다. 한국 창의 산업의 혁신을 연구하다 보면, 한국은 끊임없이 ‘과잉 프로덕션’을 유지해 왔다는 점이 눈에 띈다.
1990년대 이후 5000만 인구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시장에서 경쟁적인 프로덕션이 지속되었다. 제목을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드라마가 생산됐고, 지금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아이돌 그룹이 해마다 데뷔하고 있다. 제작되지 못하는 수많은 시나리오가 쓰여지고 보이지 않는 인디밴드와 아티스트들이 창의 산업의 경쟁에 기본 전력이 되어 왔다. 화려한 넷플릭스 오리지널은 한류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한류에 올라탄 것이다. 세계 ‘한드’(한국 드라마) 애호자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대다수 작품들은 방송 드라마 시스템이 발굴하고 키운 인재들이 이뤄 냈다.
지금 정책이 개입해야 할 부분은 이와 같은 과잉 프로덕션 상황을 유지할 수 있도록, 즉 문화산업 속에서 꿈을 키우는 능력 있는 청년들이 지속 수혈되고 이들의 실패가 나락이 아닌 미래 성공의 거름이 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정부 지원과 같은 외적 수혈이 아니라 시스템 내에서 선순환 가능한 한류 산업의 장기적 비즈니스 모델이 필요한 이유다. 앞에서 말한 한류 유관 산업 기업들이야말로 한류 창의 산업의 지속 성장이 그들 자신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기업들이며, 산업적 이득의 일부를 한류 창의 산업에 재투자해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 필요와 의무가 이들에게 있다고 본다. 지금 운용 중인 모태펀드 같은 단기 결과 중심적 투자보다 한류 생태계에서 충분한 프로덕션이 가능하도록 장기적이고 기초적으로 투자하는 ‘한류 펀드’(가제)를 제안한다.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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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
2025-12-2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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