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村)스러운 이야기⑤ |녹차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수정 2010-05-30 15:57
입력 2010-05-30 00:00
내가 처음 이곳에 이사 온 해 그렇게 놀고만 있는 내가 딱했던지 이웃 차공장에서 일하는 할머니 한 분이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와서는 젊은 사람이 왜 그렇게 놀고 있냐고 차공장에라도 나오면 일당 얼마를 벌 수 있다고 선심 쓰듯이 일러주고 가셨습니다. 그 정도로 노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하루 종일 그렇게 오르내리기를 몇 번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해가 질 무렵이면 나도 모르게 손이 빨라져서 차 따는 손이 바쁩니다. 별로 못 딴 것 같아도 하루 종일 따 모은 찻잎은 그래도 제법 소쿠리에 가득하고, 그 잎은 보석처럼 영롱하게 반짝입니다.
잠시 쉴 틈도 없이 차솥에 불 붙여 놓고는 저녁밥도 후딱 먹어치우고 그때부터 불과 차의 만남에 내가 개입을 합니다. 열이 바짝 오른 차솥 온도는 300도 이상입니다. 그 열 솥에 작고 여리기만 한 연록의 앙증맞은 찻잎은 그러나 타지는 않습니다. 익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내 손이 찻잎을 타지 않게, 그렇지만 고루고루 잘 익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 과정을 덖는 과정이라고 하는데 덖음은 볶음과는 다릅니다. 볶는다는 것은 일부를 약간 태우기도 하고 눌기도 하는 것이지만 덖음은 절대 타거나 눌면 안됩니다. 조금이라도 타거나 눌게 되면 그것은 차로서는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자면 손은 얼마나 바빠야 하고 얼마나 민감해야 하는지 알만 할 것입니다. 그때는 그 어떤 것도 비집고 들어올 틈 없이 오로지 차솥의 열기와 그 열기에서 익어가는 찻잎과 내 손만 있을 뿐입니다. 차를 딸 때는 고요한 단순노동을 하며 명상을 하기도 하고 그냥 삼매에 들기도 하고 지난 일을 생각하며 아직도 소화 안 된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 것들을 꺼내서 욕도 해보고, 후회도 해보고 웃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지만 차솥에 차가 들어가 있는 시간만큼은 차 이외의 것은 없습니다.
차를 완성하는 데 어느 과정이나 다 중요하지만 첫 덖음 과정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첫 덖음 과정에서 실패하면 그 다음 과정을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첫 덖음에서 차의 품질이 정해진다고 보면 됩니다. 그 다음 과정은 첫 덖음 과정보다는 긴박하지 않습니다.
다 익은 찻잎을 꺼내 빠른 속도로 식힌 후 비벼주고 덩어리 지지 않게 털어줍니다. 이제는 온도가 많이 내려간 차솥에 다시 차가 들어가서 조금 천천히 하지만 신중하게 다시 덖어 줍니다. 이 과정들을 통해 차는 서서히 말라가며 찻잎에서 차로 변해갑니다. 요즘은 차 만드는 사람도 워낙 많고 또 각자 자기만의 차를 만드는 방식이 있어서 차 맛이 같을 수는 없지만 차를 만드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최고의 차를 만들어낸다고 보면 됩니다. 누구나 최선을 다해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차밭에서 나오는 얼마 안 되는 차로, 또 종일 나 혼자 따 모은 찻잎으로 어떤 때는 밤을 꼴딱 새우기도 합니다. 차는 손이 많이 갈수록 좋은 차가 되고, 아무리 손이 가도 또 손이 갈 곳이 있는 것이 차입니다. 혼자 밤새도록 찻잎을 만지고 어르고 하다보면 소쩍새는 왜 그리 슬피 우는지, 그 소리는 왜 그리 구슬픈지, 어느덧 먼동이 어스름하게 트고 저 아랫동네 수탉이 목청껏 새벽을 알리고 산이 깨어납니다.
새들이 부산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면 차 삼매에 빠져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 시간을 확인합니다. 차의 계절이 끝날 때까지 그 일상은 비슷하게 반복됩니다. 우물 위 바위 틈 차나무는 그 나무 찻잎만 따로 따 모아서 그것만 따로 덖습니다. 양이 너무 작아서 그 나무만 따로 하는 것이 번거롭기는 하지만 좀 더 특별한 그 나무 찻잎만의 맛 때문에 포기할 수 없습니다.
또 우리 집 차를 다 따서 법제한 후에는 불일평전과 주변에 조금 있는 야생차를 따기 위해서 산을 오르내립니다. 야생차는 차나무가 다듬어져 있지 않아서 찻잎을 많이 딸 수가 없습니다. 보통 차나무는 가지를 쳐주기 때문에 그 다음해 더 가지가 많이 올라와서 차를 많이 딸 수 있지만 야생차는 그냥 자랐기 때문에 가지가 많지 않고 잎도 많지 않습니다. 야생 차나무 한그루에 고작 딸 수 있는 찻잎은 한 개, 많아야 두세 개뿐 이니 여간해서는 모이지도 않고, 차나무도 많지도 않아서 찾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들인 노력에 비해서 보잘것없는 양이지만 그것 또한 차 맛의 오묘함 때문에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올해는 어떤 차 맛이 나올지 궁금합니다. 지난겨울의 매서운 추위와 올봄의 잦은 비로 차 맛에 지장은 없을지 궁금합니다. 차 철이 돌아왔습니다. 동네 왕건달인 나도 바쁜 철입니다. 글_ 남난희 《낮은 산이 낫다》 저자·사진_ 월간 《다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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