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다시 모성이 싹트기를 소망하며
수정 2009-05-08 00:00
입력 2009-05-08 00:00
나는 예순이 다 된 지금도 힘든 일이 있을 때 어머니를 먼저 생각한다. 내게 어머니는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사랑이다. 어머니를 찾아뵙기 힘들 때는 전화를 통해서 어머니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얻는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견디기 힘든 일이 있을 때 어머니의 음성이라도 들으려고 공중전화기에 동전을 넣던 기억이 내겐 참으로 소중하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의 목소리만 들어도 힘이 나고 마음의 평정을 찾는다. 틀니를 뺀 합죽한 어머니의 미소만 봐도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진다. 그래서 어머니의 미소에는 신비가 있다고 하는 것일까. 어떤 땐 아흔이 다 된 어머니를 힘껏 껴안거나 어머니의 젖가슴을 슬쩍 만져볼 때가 있다. 그러면 어머니는 “얘가 미쳤나, 아이고 징그러워라.” 하시면서 나를 밀쳐내신다. 그럴 때마다 나는 행복하고 감사하다. 이보다 더한 행복과 감사가 어디 있을까. 설령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그 행복과 감사는 지속될 것이다. 한때는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기 힘들어 부부간에, 친구간에 다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자 사랑의 본질이 쉽게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던 한 청년이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두 눈을 잃게 됐다. 청년은 어머니의 정성스러운 위로와 간호에도 불구하고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쪽 눈을 기증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청년은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두 눈을 다 기증받아 예전과 같아지길 고대했기 때문이다.
“얘야 한쪽이라도 어떠냐. 그래도 수술을 받으려무나.” 그는 어머니의 간청에 못 이겨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붕대를 풀던 날, 왈칵 울음을 쏟아내었다. 어머니의 한쪽 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얘야, 두 눈을 다 주고 싶었지만, 이 다음에 앞 못 보는 어미를 네가 돌보아야 할 걸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단다.”
이 이야기를 예화에 불과하다고 할 수가 없다. 어머니의 사랑엔 이런 희생이 바탕을 이룬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랑, 그것이 바로 모성이며 사랑의 본질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희생하지 않고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희생 없는 사랑은 사상누각인데도 말이다.
우리 사회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는 어머니가 없는 사회이며 모성이 부재된 사회다. 이 세상에 부모 없이 태어난 자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엔 부모 없이 태어난 자식들만 넘쳐나는 것 같다. 그래서 하루하루 살기가 너무 힘들다. 있는 자와 없는 자로, 좌와 우로, 친미와 반미로 갈라진 우리 사회에 모성적 사랑이 존재한다면 오늘 하루가 이토록 고달프지는 않을 것이다. 마침 어버이날을 맞아 모성이 싹트는 우리 사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
정호승 시인
2009-05-0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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