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자루 쥔 은행 “그래도 대기업이 두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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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9-05-05 00:44
입력 2009-05-05 00:00

“큰 손님을 어떻게… 이로울 게 없다” 대기업 구조조정 ‘찻잔속 태풍’ 우려

대기업 구조조정과 관련해 정부가 연일 은행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 “뒤는 내가 봐줄 테니 믿고 밀어붙이라.”는 식이다. 그러자 은행은 “대기업 오너가 사재라도 털라.”며 압박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 속내는 편치 않다. 갑을 관계는 늘 유동적인 탓에 은행 내부에서는 초우량고객(VIP)의 목을 죄는 것이 이로운 일인지 따져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심스레 나온다. 대기업 구조조정은 ‘찻잔 속의 태풍’이 될 것이란 우려도 고개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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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정부가 밀어붙이지만 속내 편치않아”

은행은 대부분 ‘갑(甲)’이다. 하지만 대기업과의 관계에서는 ‘을(乙)’일 때가 잦았다. 몇 달 사이 상황이 역전됐다고 하니 은행들도 얼떨떨하다. 시중은행 기업영업 담당임원은 “정부가 아무리 밀어붙이라고 해도 대기업은 은행 입장에선 정말 큰 손님”이라면서 “특히 지난해 말 외화를 빌려달라고 여기저기 기업에 손을 벌린 은행들은 난처함이 이만저만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은행이 고민하는 부분은 을이었던 자(者)의 ‘도리’가 아니라 미래에도 자신들의 위치가 ‘을’ 일 수 있다는 점이다. 한 은행 자금담당 부장은 “썩어도 준치라고 일부를 도려내도 나머지 그룹이 살아있는 한 대기업은 변치 않는 갑”이라면서 “정말 가망 없다고 보는 일부 그룹에는 혹독히 대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기업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득될 게 없다는 점을 은행은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사정은 당국도 잘 안다. 최근 주재성 금융감독원 부원장보는 기자들을 만나 “과거와 달리 대기업은 갑이고 은행이 을이라 구조조정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며 우려를 표시했다.

●행주 내놓아도 걸레 가격만 쳐 줄 것

구조조정까지 가는 길도 가시밭이다. 현재 대기업 구조조정의 핵심은 부채비율 개선이다. 최선책은 계열사 매각이라는 답이 이미 나와 있다. 하지만 제값 받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기업이 실제 회사를 팔려고 할지가 미지수다. 시중은행 한 여신담당 부행장은 “지금 시장은 행주를 내놓아도 걸레 가격으로 팔릴 분위기이지만 정작 팔 사람은 행주 가격만을 원할 것”이라면서 “수요와 공급이 불일치해 상식 이하의 가격이 형성될 텐데 대기업 입장에서도 무조건 팔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했다.



결국 약정을 통해 구조조정을 강제해야 하는데 정작 약정 자체는 강제성이 없다. 이 때문에 계열사 매각이나 경영권 박탈 등의 껄끄러운 요구는 못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일부에서는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태도에도 불만을 표시한다. 국책은행 기업담당 임원은 “정부가 밀어붙이면 말없이 따르던 외환위기 때와 지금은 전혀 다르다.”라면서 “기업도 이젠 세계화돼 있고 체질이 좋아진 만큼 구조조정은 규정과 원칙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우격다짐은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는 “금감원장이든 대통령이든 법 위에 설 수 없는 것처럼 위에서 압박한다고 해서 그들(기업)도 무조건 따라오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은행 기업영업그룹 담당 부행장도 “기업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다급하지 않다거나 계열사 매각 같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협조를 잘 안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유영규 최재헌기자 whoami@seoul.co.kr
2009-05-05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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