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녹슬게하는 산업화의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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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8-12-05 01:10
입력 2008-12-05 00:00

김숨 장편소설 ‘철’

온몸에 눅진하게 녹슨 쇳가루가 엉겨붙어 있는 듯하다.녹가루가 황사처럼 자욱이 감싸고 도는 마을에서 아이들은 무쇠공을 주고받으며 논다.멀쩡한 어금니를 가진 사내들은 북쪽 조선소로 ‘세계 최고 철선’을 만들러 갔고,아내들은 무쇠 식칼을 몇 자루씩 가진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무료한 노인네들은 숫제 일삼아 무쇠 가위를 쩔그럭거린다.또 생 어금니를 몽땅 빼고 무쇠 틀니를 해 박는다.그리고 건강에 좋다며 녹가루를 하루에 두어 숟가락씩 푹푹 퍼먹는다.그러다가 죽으면 무쇠로 짠 관 안에 들어간다.온통 ‘철(鐵)’로 둘러싸인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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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은 철선이 만들어지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더 이상 농사를 짓지도,가축을 기르지도 않았다.하지만 32년이 지나도 마을 사람들은 물론,조선소 노동자 어느 누구도 끝끝내 철선을 보지 못한다.1970년대 즈음 울산이 떠올려진다.하지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철저한 가상의 시대,가상의 공간이다.거기서 펼쳐지는 지독스럽게 기괴한 우화(寓話)다.

●섬뜩한 언어와 상황 설정

김숨은 신작 장편소설 ‘철’(문학과지성사 펴냄)에서 노동의 가치,노동의 소외 문제,산업화의 과정 속에서 부속물로 전락한 인간의 문제를 얘기한다.그러나 의식의 각성을 통한 변혁의 승리적 전망을 얘기하는 노동계급적 리얼리즘이나,기본계급으로서 민중들의 건강한 삶이 그려지는 민중적 리얼리즘 등 1980년대 문학의 전형성은 서른 네 살의 젊은 작가 김숨의 몫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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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이야기꾼’ 김숨의 선택은 환상적 리얼리즘.산업화와 노동자의 희생이 엉켜서 때로는 우화처럼,때로는 섬뜩한 현실을 눈살 찌푸리게끔 그로테스크하게 써내려간다.

김숨은 전작 ‘백치들’에서 보여줬던 서늘한 시선의 관찰자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오히려 에둘러가는 듯하면서도 더욱 섬뜩한 언어와 상황을 설정했다.다이내믹한 서사도,이야기를 끌고가는 주인공도 딱히 없다.

하지만 특유의 흡입력 높은 문체는 노동과 철선을 맹신하고,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에 만족하고,부속품으로 효용이 다해 버려지면서도 저항하지 않는 이들의 삶을 고발하듯 그려내는 데 대단히 효과적이다.

●선박 노동자가 모티브

상투적인 전형성을 배제하려는 노력은 파업 대목에서 더욱 두드러진다.김만도는 조선소에서의 노동을 종교처럼 믿고 따르다가 결국 해고된 동료 배복만에게 “조선소와 투쟁하세요.”라고 툭 내던진다.하지만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던진 자신을 이내 스스로 역겨워하고,나중에 석 달치 임금이 나오지 않으며 일어난 ‘폭동(또는 파업)’에서 젊은 동료를 주모자로 고발하며 질기게 살아남는다.

김숨은 “4년 전 우연히 들른 남쪽 도시에서 본,거대한 선박에 노동자들이 개미처럼 붙어 있는 장면이 모티브가 됐다.”면서 “애초에는 파업 관련 부분을 자세히 쓰려 했는데 너무 상투적인 것 같아 의도적으로 노동자의 자의식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그는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느림에 대하여’,1998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중세의 시간’이 당선되어 등단했다.‘투견’‘침대’등 소설집과 장편소설 ‘백치들’을 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2008-12-05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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