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헌의 캔버스 세상] 마크 퀸,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숙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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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8-07-15 00:00
입력 2008-07-15 00:00
우리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죽음을 사랑하고 삶을 미워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삶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쳐 우리 자신과 우리가 아끼는 대상에 영생을 불어넣으려 할 때 그것은 왠지 죽음을 향한 열망처럼 느껴진다. 이를테면 조화 같은 게 그렇다. 금세 시드는 꽃의 운명을 거부하려 애쓰는 그 몸짓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영원한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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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퀸의 서울 전시(8월3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갤러리)에서 우리는 조화에 못지않은, 아주 인공적인 색채로 반짝이는 꽃 그림을 볼 수 있다. 갖가지 원색으로 얼룩진 그의 꽃들은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 감탄을 자아내지만, 색채 자체가 음식에 뿌려진 인공색소 같고 그 정교함과 치밀함이 비닐이나 플라스틱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그의 그림에서 보는 것은 그래서 꽃의 죽음이다.

인상적인 것은, 그의 꽃이 일반적인 조화처럼 영원한 삶의 표정을 담으려다 결국 노골적인 죽음의 표정을 띠게 된 게 아니라, 애당초 화가가 죽음을 의식하고 그려 그렇게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마크 퀸이 꽃을 통해 나타내고자 한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인간의 욕망이다. 그의 꽃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것들은 피고 지는 시기를 달리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한자리에 모여 있다. 과학 기술의 진보 덕분이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 자연의 질서를 어그러뜨린 결과다.

과거에도 서양에서는 이처럼 다른 계절의 꽃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전통이 있다. 그때 그 그림들은 그 집합의 불가능성으로 신의 섭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제 마크 퀸의 그림은 그 집합의 가능성으로 인간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공적인 색채나 플라스틱 같은 질감은 그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부러 동원한 것이다. 인간은 욕망하는 만큼 진화할 것이다. 하지만 그 진화의 속도와 크기만큼 존재에 대한 허무감도 커질 것이다. 바로 그 허무감이 죽음의 본질이다. 허무감이야말로 진정한 죽음이다.

마크 퀸은 예전에 알코올 중독을 심하게 앓았다.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 끝에 마침내 알코올 중독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이때의 정신적, 정서적 경험을 이후 계속 작품에 담고 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90년대의 문제작들-이를테면 자신의 피 4리터가량을 부어 만든 자소상 ‘셀프’-에서 그 자취를 진하게 엿볼 수 있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 ‘환영에 대한 명상’,‘사느냐 죽느냐’ 등도 명상하는 해골의 이미지를 통해 죽음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숙고한다. 물론 그만큼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도 숙고한다.

그는 어떤 도덕률도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극도로 피한다. 하지만 삶과 죽음 앞에서 우리가 택할 것은 항상 삶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묻는다. 무엇이 삶이고 무엇이 죽음인가?

미술평론가
2008-07-15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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