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말이 지배하는 사회/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학 교수

  • 기사 소리로 듣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공유하기
  • 댓글
    0
수정 2008-03-13 00:00
입력 2008-03-13 00:00
이미지 확대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학 교수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학 교수
우리사회는 글보다 말이 지배한다. 우리사회가 작동하는 내면의 속살을 들여다 보면 책이 부족하던 시절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자를 도입해 문자생활을 시작한 지 수천년이 지났고 우리 문자를 발명한 지 몇백년이 흘렀지만 글은 여전히 우리 삶에서 멀리 있다.

교수들 가운데 장관이나 청와대 수석 같은 고위직을 임명하려고 하면 논문 표절 시비가 끊이질 않는다. 표절이 문제가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문제는 왜 표절이 발생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표절이 이루어지지 않으려면 남의 생각과 내 생각이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고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널리 읽혀야 한다.

문제는 논문을 써도 그것을 꼼꼼하게 읽어주는 사람이 없다. 그 논문에 관한 토론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니 논문은 연구 업적을 채우기 위한 요식행위일 뿐 읽어주는 독자가 없으니 복제에 복제를 거듭한다고 해서 문제될 게 없다.

우리글로 된 인터넷사이트를 검색하다보면 정보들이 대부분 비슷비슷하다. 이곳이나 저곳이나 내용이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러저리 퍼옮긴 정보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남의 글을 마음대로 퍼나르고 사용하면서도 인용도 하지 않고 출처도 밝히지 않는다. 죄의식이 별로 없다. 네이버 지식검색 사이트와 위키피디아 사이트에서 정보가 제공되는 양식을 비교해 보면 차이점을 금방 발견할 수 있다. 일반 국민도 날마다 표절을 하는 것이다.

논문이나 책에서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참조나 인용 또는 각주라는 형식은 글 문화에서 발달한 문화적 유산이다. 책이나 글이 넘쳐나는 서양에서 발달한 양식이며 글을 관리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이다. 하지만 말이 지배하는 문화에서 남의 말을 인용할 필요는 없다. 하려고 해도 인용할 근거 자료를 찾을 수 없다. 말이라는 것은 공중으로 떠돌아다니고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추적하는 것이 쉽지 않다. 말은 사람들 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에 정확하지도 않다. 따라서 인용할 필요도 없으며 마음대로 사용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말이 지배하는 문화에서 글은 애매하고 흔히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제대로 담고 있지도 않다. 어떻게 충실하게 제 생각을 담아내야 하는지 모르기에 문서는 매우 형식적이며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진정한 뜻은 글보다는 글쓴이의 머릿속과 말에 담겨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 인수위의 영어교육과 관련한 혼란도 따지고 보면 글보다는 말이 문제가 되었다. 일반 국민에게 인수위에서 제시한 문서보다 인수위원장의 말이 더 문제가 된 것이다.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신문기사에 인용된 것은 이경숙 위원장의 말이지 공식 문서에 담긴 글이 아니었다.

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회가 운영되는 근거를 글에서 찾기 어렵다. 중요한 내용은 글로 정리되어 있지도 않으며,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아 자료 추적이 가능하지도 않다.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후보자가 대학 시절에 쓴 연애편지가 들춰지고 그가 행한 모든 공적인 기록이 근거자료로 들춰지는 것은 글 문화에서나 볼 수 있다. 글로 된 자료를 찾아내고 그것을 근거로 검증하는 행위는 글로 작동되는 사회에서 가능한 얘기다.

우리는 하루빨리 글 문화에 어울리는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시스템을 도입해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글을 읽고 다루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

말이 되었건 글이 되었건 기록을 남기고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널리 공유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공허한 말싸움뿐인 청문회, 제대로 된 매뉴얼이 없어 불타버린 숭례문, 논문 표절 시비가 끊이지 않는 현실은 우리가 글을 다루는 데 아직 후진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한 단면에 불과하다. 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치러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학 교수
2008-03-13 30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에디터 추천 인기 기사
많이 본 뉴스
원본 이미지입니다.
손가락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확대해 보세요.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