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품의 허구’를 까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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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7-11-23 00:00
입력 2007-11-23 00:00
위작 파문으로 연일 미술계가 뒤숭숭하다. 무더기로 적발된 박수근·이중섭 화백의 위작들로 검찰이 전시회를 갖겠다고 벼르기까지 하는 상황은 웃지 못할 한편의 코믹 드라마다.

새책 행렬 속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책이 ‘라파엘로와 아름다운 은행가’(데이비드 브라운 등 지음, 김현경 옮김, 휴먼&북스 펴냄)인 것은 그런 세태 탓일까. 게다가 제목이 여간 수상하지가 않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라파엘로와 은행가는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미술적 식견이 있다면 ‘빈도 알토비티 초상화 이야기’라는 부제에서 궁금증은 오히려 더할 듯하다.

장밋빛 입술에 청회색 눈동자의 청년이 묘하게 사선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는 라파엘로의 걸작(초상화 ‘빈도 알토비티’)에서 화가의 어떤 이야기를 새삼 꺼내겠다는 말인가.

이 책은 그림의 가치가 어떤 요인들로 결정되는지를 신랄하게 까발린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단을 풍미한 천재작가의 작품 한점을 매개로, 집요할 만큼 일관되게 주제를 향해 나아간다. 라파엘로의 작품 ‘빈도 알토비티’의 유전(流轉)은 예술품 가치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결정적 단서가 될 만하다.

초상화의 주인공 청년 알토비티는 5세기 전 이탈리아 유력 은행가 집안의 상속자. 후대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3대 거장’으로 불리게 된 라파엘로가 그를 화폭 앞에 앉혔다. 화가가 당대 최고 유력가 집안의 후계자를 묘사하는 데 얼마만큼 공을 들였을지는 그대로 그림이 말해준다.“모델의 외모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데서 나아가, 라파엘로가 상상해낼 수 있는 가장 잘생긴 젊은이로 탄생시켰다.”는 해설을 통해 책은 예술품 탄생의 허구성을 슬몃 짚어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탄생한 그림이 엉뚱하게 라파엘로의 자화상으로 둔갑돼 값이 치솟았던 사실에 주목한다.16세기 이탈리아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의 애매모호한 글귀에서 어처구니없는 오해가 비롯됐다는 것이다.“그가 젊었을 때 빈도 알토비티를 위해 그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 그림이 가장 대단하게 여겨진다.” 바사리가 ‘예술가의 전기’에 묘사한 ‘그’가 라파엘로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 통에 삽시간에 그림가치가 급등하는 해프닝이 이어졌다. 유력 화상들이 주목했음은 물론이다.1808년엔 바이에른 황태자 루트비히에게 라파엘로의 자화상이라는 프리미엄이 붙어 팔렸고, 루트비히는 또 얼마 뒤 뮌헨의 왕실 컬렉션에 작품을 기증했다.

인기가 치솟던 초상화는 그러나 다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일부 감식가들이 라파엘로의 제자가 그렸다는 주장을 내놓자 그림값은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진 것.1938년 뮌헨미술관은 문제의 그림을 방출했다.‘빈도 알토비티’의 인기는 결국 라파엘로의 ‘얼굴값’이었던 셈이다. 이후 ‘빈도 알토비티’는 밑그림이나 제작기법 등으로 보아 라파엘로가 그린 진품으로 다시 인정받았다.

현재 그림이 걸려 있는 곳은 워싱턴 DC의 미국국립미술관. 초상화 한 점의 궤적에서 미술품 가치의 진실을 넘겨다본 책의 저자는 그곳의 큐레이터다. 그는 “세월이 흐르며 그림의 궤적이 바뀌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림에 매혹된 관람자들이 그 흐름을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일침을 가한다. 서양 근·현대미술사에 빛나는 다양한 초상화들을 감상하는 여유까지 만끽할 수 있는 책.2만 90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2007-11-23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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