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자금시장 왜곡 주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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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6-10-11 00:00
입력 2006-10-11 00:00
시중은행들이 회사채 시장의 ‘큰 손’으로 떠오르면서 자금시장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우량 대기업의 회사채를 사모사채 인수 형식으로 독식하는 한편 대출 재원 마련을 위해 은행채를 대규모로 발행해 회사채 시장의 수요와 공급을 모두 은행이 틀어쥐고 있다는 지적이다. 채권 전문가들은 “회사채 시장이 신용등급이 우량한 대기업과 은행 중심으로 단순화되면 다양한 회사채가 거래되기 힘들다.”면서 “특히 신용등급이 낮은 중소기업의 자금 조달이 막힌다.”고 우려한다. 자금 중개 기능이 최대 목표인 은행이 자금 시장을 왜곡시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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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사모사채 인수 규모 지난해 6배

10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들어 8월까지 국책은행을 제외한 시중은행들의 사모사채 인수 증가액 규모는 11조 3000억원에 이르렀다. 이는 지난해 1∼8월의 증가액 1조 9000억원에 비해 6배 늘어난 규모다.

은행의 사모사채 인수 규모가 증가하는 것은 은행과 대기업의 이해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사모사채는 50명 미만의 투자자를 대상으로 발행되는 회사채로, 법적으로 보면 유가증권에 속한다. 그러나 공모 회사채를 인수할 수 없는 은행들은 사모사채 인수를 통해 대출과 같은 효과를 본다.

공모 회사채를 발행하려면 발행 수수료를 내야 하고, 절차도 복잡하기 때문에 기업은 사모사채 발행을 선호한다. 은행들이 사모사채를 인수할 경우에는 대출과 달리 신용보증기금이나 기술신용보증기금에 출연금을 낼 필요가 없어 그만큼 금리도 낮아진다.

은행들은 대기업의 대출 수요가 줄어들자 은행감독규정상 대출로 간주되는 사모사채 인수를 통해 자산 확대 경쟁을 펼치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영업 경쟁이 심화되면서 대출보다 낮은 금리를 제시할 수 있는 사모사채 인수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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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채 발행도 3배 늘어

대기업들이 사모사채 발행으로 자금을 조달하면서 공모 회사채 발행은 점점 부진해지고 있다. 지난해 1조 2000억원이었던 공모 회사채 순발행액(발행액-상환액)이 올해 1∼8월에는 2조 1000억원 순상환을 기록, 마이너스 행진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체 채권발행시장에서 차지하는 회사채의 비중이 뚝 떨어져 채권시장 왜곡 현상이 심해졌다.

증권선물거래소에 따르면 거래소에 상장된 채권 기준으로 올 들어 지난 8월까지 발행된 회사채는 17조 9400억원으로 이 기간에 발행된 전체 채권 254조 5300억원의 7%에 불과했다. 국내 채권시장의 96% 이상이 국채나 은행채로 채워진다는 얘기다.

특히 은행들은 사모사채 인수 및 주택담보대출 재원 마련을 위해 은행채를 쏟아내고 있다. 금융감독원 등에 따르면 은행들은 올 들어 9월 말까지 은행채를 33조 3658억원어치 순발행,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순발행이 3배에 이르렀다.

대기업의 사모사채를 은행이 싹쓸이하고, 그 빈 자리를 은행채가 메우는 형국이다. 특히 주택담보대출이 증가할 때 은행채 발행도 함께 늘어나는 현상을 보여 은행들은 증권시장에서 자금을 끌어 모아 집값 상승을 조장하는 주택담보대출을 늘렸다는 비난을 피하기 힘들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채는 정기예금과 달리 예금보험료를 지급하지 않는 이점도 있다.”고 밝혔다.

한국금융연구원 강영훈 연구위원은 “신용등급이 높은 대기업 회사채를 은행이 사모 형식으로 인수하고, 은행은 다시 신용등급이 더 높은 은행채를 쏟아내고 있다.”면서 “채권시장이 은행-대기업의 1대1 구조로 단조로워지면 다양한 기업의 회사채를 평가하는 능력을 상실한다.”고 우려했다. 그는 특히 “투자자가 많은 공모 회사채는 조건 변경이 쉽지 않아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자금운용 계획을 짤 수 있지만 사모사채는 은행이 조기상환을 요구하면 기업이 들어줄 수밖에 없어 자칫 기업의 유동성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2006-10-1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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