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통행 문화바우처 장애인에 ‘文化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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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기자
수정 2006-07-15 00:00
입력 2006-07-15 00:00
소아마비로 세 살 때부터 목발을 짚어온 2급 지체장애인 신모(40)씨. 그는 요즘 정부 탁상행정의 실상을 몸으로 느낀다. 지난해 그는 세 번에 걸쳐 아내(36·지체장애 1급)·아들(10)과 즐거운 영화 나들이를 했다. 정부가 시범 실시했던 ‘문화 바우처(voucher)’ 사업 덕이었다. 돈이 없어 집에서 비디오 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던 신씨 가족에게 무료로 영화 등을 볼 수 있게 한 문화 바우처는 큰 혜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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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이 사업이 지난달 본격 시행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자유롭게 쓰지 못하고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정해진 콘텐츠만 이용할 수 있도록 바뀌어 버렸다. 신씨는 “장애인들끼리 몰려다니다 동물원 원숭이처럼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 정책 당국자가 상상이나 하겠느냐.”고 말했다.

장애인 등 소외계층의 문화생활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문화관광부가 지난달부터 본격 시행하고 있는 문화 바우처 사업이 장애인들의 선택권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이 사업은 장애인과 저소득층 어린이·노인 등 소외계층을 위해 영화·연극·뮤지컬 등의 무료 이용권을 주는 복지사업이다.

지난해 시범실시에서 1인당 연간 3만원 한도에서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해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본격 시행에 나서면서 제도가 확 바뀌었다. 새로 사업주체가 된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전부터 이 위원회가 해 오던 ‘신나는 예술여행’ 사업과 성격이 비슷하다며 흡수 통합시켰다. 대신 이름만 ‘문화바우처’를 앞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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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들은 새 제도가 영화·공연 등의 시간·장소를 지정하기 때문에 단체관람을 할 수밖에 없으며 수치심을 느끼게 만든다고 말한다. 또 장애인들이 선호하는 영화의 편성비율이 전체 문화콘텐츠의 20% 이하로 규정된 것도 현실을 무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난해 한국장애인문화협회가 장애인들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최근 여섯달 동안 경험한 문화활동으로 가장 많은 41.4%가 영화·연극을 꼽았다.

장애인의 이동 편의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소아마비 1급 지체장애인 안모(54·서울 구로동)씨 역시 지난해 문화 바우처 사업을 이용해 영화만 6차례 관람했다.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동네와 가까워 이동하기도 쉬운데다 장애인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있어 즐거움이 컸다. 그러나 이달 초 뮤지컬을 보기 위해 찾았던 대학로의 극장은 지하에 있는데다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나눔팀 양경학 팀장은 “이 사업에는 장애인뿐 아니라 저소득층 노인과 소년소녀가장 등도 참여한다. 바우처만 제공하면 교통편·식사·현장안내 등 각종 편의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업을 통합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2006-07-15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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