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가 맺어준 부부
수정 2006-07-11 00:00
입력 2006-07-11 00:00
『애정은 국경과 편견과 오해를 뛰어 넘었읍니다. 그것은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어쩌면 영원히 어울릴 일 조차 없었을지도 모를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마음을 하나로 여물게 하여 이 곳 서울에 하나의 가정을 낳게 했읍니다. 신랑•신부의 앞날에 축복을 보내는 사람은 오늘이 자리에서 주례를 맡은 저 한사람만이 아닐 것입니다…』崔致煥(최치환•대한 축구협회회장)씨의 주례사가 계속되는 동안 신부는 그 말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숙인채 감격의 눈물만 떨어뜨리고 있었다. 퇴장하는 신부의 얼굴은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11년전 학생축구「팀」으로 일본에 원정가서 알게 돼
신랑 朴景和(박경화•31•서울 성북구 성북동 1가)씨와 智惠子양이 알게 된 것은 지금부터 꼭 11년 전인 1958년. 20세의 朴씨는 연세대의 1학년이었고 智惠子양은 15세로 일본 栃木縣 足利市에 있는 모여고1학년이었다.
한국인학생 朴군은 학생 축구「팀」의 일원으로 일본에 원정 갔었다. 이때 그는 재일교포인 方舟(栃木縣足利市)씨에 초대되어 그 자택을 방문했다. 方舟씨는 일본에서 사업을 크게 벌이고 있는 재일교포. 축구「팬」이었다.
朴군은 方舟씨댁에서 여학생복 차림의 앳된 일본인 소녀를 소개 받았다. 方舟씨의 일본인 아내의 언니의 딸, 바로 오늘의 智惠子양이었다.
智惠子양은 그 날 이모부의 나라에서 축구선수가 왔다기에 어린 호기심을 가득안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이모부는「스포츠•시즌」이되면 밤낮 없이 한국축구를 자랑삼아 콧대를 저 일본 최고봉이라는 富士山보다 더 높게 했었다.
이 우연스러운 만남이 두 사람의 운명을 이토록 바꿔 놓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었다고 신랑 朴군과 신부 智惠子양은 식이 끝난뒤에 말하고 있다.
朴군은 이 때 귀국한 뒤 方舟씨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方舟씨 轉交(전교)로 智惠子양에게도 서툰 영어로 간단한 인사치레의 글을 동봉했다. 이것이 두 사람의 교제의 시초다.
현해탄 오간 戀書(연서) 5백통 임 보고파 대표선수 되고
그 후 朴군은 연세대를 졸업하자 축구의 국가대표선수로 활약하게 됐다. 朴군의 형 景浩(경호•39•建大(건대)체육강사•축구「코치」)씨 역시 54년에서 58년까지의 5년간 우리나라의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朴군은 형이 은퇴한 뒤를 이어 59년에 국가대표선수로 발탁되어「인사이드」와「윙」을 맡아 이름을 떨쳤다.
그는 이해 국가대표선수로 처음으로 일본에 원정갔다. 누구 보다도 朴군을 반겨 준 사람이 바로 智惠子양이었다.
朴군과 智惠子양 사이에는 그 이후 영어와 일어로 편지가 오고 가게 됐다.
한 달에 두번 이상은 꼭 편지를 쓰고 또 받았다. 11년 사이에 주고 받은 편지는 약 5백통에 이르렀다.
朴군은 智惠子양과「펜•팰」이 된 이후 智惠子양을 만나기 위해 축구에 더 열을 올렸다. 국가대표선수의 자리를 유지해야 일본에 갈 수가 있고 일본에 가야 小野 智惠子양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朴군은 24세가 될 때 까지 1년에 1~2회 일본에 원정했다. 그러나 그의 앞길에는 행운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나친 연습으로 말미암아 다리를 다쳐 상처를 입고 대수술을 해야했다. 이 바람에 선수생활을 눈물을 머금고 단념해야 했다.
그 사이에도 항공우편은 현해탄의 하늘을 쉴새없이 날아갔다.
朴군은 일본에 가기 위해 한 때는 근무하던 第一毛織(제일모직)을 그만둔 일까지 있다. 일본가는데 미쳐 버렸다고 온 집안이 야단이었다. 그러나 선수생활을 그만둔 이후로는 일본으로 건너갈 기회는 오지 않았다.
“한국의 풍습 빨리 익혀서 좋은 아내가 돼 보겠어요”
다시 기회가 온 것은 올해 7월. 그는 세계축구연맹이 일본에서 연「코치•아카데미」에 나가게 되었다. 약3개월동안 그는「도꾜」에서 축구의「코치」에 관해 공부를 했다. 아마 이 사이에 이들은 글을 통해서 알고 지낸 서로를 더 깊이 이해라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인의 아내가 된 小野 智惠子양은 외롭지가 않다.
그녀에게는 남편도 있지만 서울 수유리에는 이모보의 부모님이 계시다. 그래서 그녀는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한국에 올 때도 이모 부부가 양친대신 한국까지 따라 나왔다. 지난달 15일 朴군과 함께 한국에 와서 결혼준비에 바빴던 그녀는 식이 끝나자마자「비자」관계로 식 다음날인 5일에 이모 부부와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 가서 한국으로의 입적수속을 마치고 한국에서 새 살림을 꾸밀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한국인의 아내가 된 일본이 신부 智惠子양은 한국을 떠날 때 이렇게 말했다.
『제가 한국으로 시집간다고 했을때는 집안이 반대했고 친구들도 말렸읍니다. 그러나 저는 편지를 통해서 알게된 그이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이곳으로 올것을 결심했읍니다. 저는 한국음식을 한국사람 보다 좋아합니다. 한국의 풍습을 익히면서 좋은 한국인의 아내가 되어 보겠읍니다.』
智惠子양 옆에서 새 며느리를 가진 신랑 朴군의 어머니는 웃음으로 얼굴의 주름살을 더 깊이 패게 하면서 한국말을 모르는 일본인 며느리를 귀여운듯 지켜 보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국가대표「스포츠」선수로서 일본인 아내를 얻은 사람은 朴씨에 앞서 韓銀(한은)에 근무하는 李秉求(이병구)씨가 있다. 李씨도 국가대표 농구선수로서 일본에 원정가서 알게된 일본인 여성 田村倭子씨와 오랜「펜•팰」끝에 맺어졌고 田村倭子씨는 현재 서울에서 딸 하나를 낳았고 KBS의 대일방송에서「아나운서」로 활약하고 있다. 智惠子양은 결혼전에 田村倭子씨의 소문을 들었다고 말했다. 일본여성은 한국의「스포츠맨」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선데이서울 69년 11/9 제2권 45호 통권 제 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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