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552)-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42)
수정 2006-03-03 00:00
입력 2006-03-03 00:00
제2장 居敬窮理(42)
다만 훗날 퇴계가 제자 조목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와 있을 뿐이다.
“일전에 서울에 사는 선비 이이가 성주로부터 나를 찾아 왔었네. 비 때문에 사흘을 머물고 떠났는데, 그 사람됨이 명랑하고 시원스러우며 지식과 견문도 많고 또 우리학문에 뜻이 있으니,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전성(前聖:공자)의 말이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았네. 다만 그가 사장(詞章)을 너무 숭상한다는 소문을 일찍이 들었기에 이를 억제하려고 시를 짓지 말도록 하였네. 떠나던 날 아침에는 마침 눈이 내렸기에 시험 삼아 시를 지으라고 차운하였더니, 즉석에서 두 편의 시를 지었네.”
그러고나서 퇴계는 조심스럽게 율곡의 시를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를 평가하자면 그 사람만 못하다하겠네. 그러나 역시 볼 만해 지금 여기에 동봉하니 읽은 후에 다시 돌려보내 주었으면 좋겠네.”
편지의 내용으로 보면 율곡이 지은 시는 퇴계가 간직하고 있었던 듯 보인다.
율곡의 전집에는 이 시가 실려 있지 않고 돌려보는 과정에서 시의 행방이 묘연하게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말을 타고 작별인사를 나누는 율곡에게 퇴계가 다가가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족하(足下)에게 드릴 물건이 하나 있네.”
‘족하(足下)’는 비슷한 연배에서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로 흔히 편지글 같은데서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존칭이나 퇴계는 이제 막 헤어지는 율곡이 자신과 ‘나이를 따지지 않고 사귀는 우정’, 즉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을 수 있는 상대임을 인정하고 그렇게 높여 불렀던 것이다.
퇴계는 손에 들린 물건을 율곡에게 내어 밀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반드시 동구 밖에 나간 후에야 이것을 펼쳐 보시게나.”
“알겠습니다.”
율곡은 스승과의 약속을 지켰다.
어느덧 음산하던 하늘은 말짱하게 개어 양광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밤새도록 내린 눈은 온 누리에 적막강산이 되어 천리에 뻗친 수수깡 밭 위를 하얗게 휩싸 안았고, 그 위에 눈부신 봄볕이 눈빛을 반사하며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퇴계의 시처럼 따뜻한 봄볕에 녹은 길은 진흙밭이 되어 말은 허덕이며 걸어가고 있었고 날 개어 지저귀는 새들은 눈밭 위를 떼 지어 나르고 있었다.
종자를 앞세우고 느릿느릿 말을 타고 가는 율곡의 마음도 그 찬란한 봄볕으로 말짱하게 개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번민하고 방황하던 끝에 찾은 예안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불과 사흘 만에 율곡의 어두웠던 마음에는 광명이 비치고 새삼스레 잊어버린 옛길에 대한 열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율곡은 느끼고 있었다.
“나는 이제 길을 잃은 미친 말이 아니다.”
마상에서 율곡은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길을 잃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나운 말은 아닌 것이다.”
2006-03-03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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