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일의 어린이책] 섬진강 24-맑은 날/김용택 지음
황수정 기자
수정 2006-02-11 00:00
입력 2006-02-11 00:00
얘들아! 죽음이 꼭 슬픈건 아니야
엄마아빠 서재에서나 봤던 시집을 그림책으로 만나는 즐거움이 아이들에겐 무엇보다 색다르겠지요. 수묵채색 삽화가 단아한 이 책은, 한 글자 한 글자 아이의 귓속에 집어 넣어주듯 읽어주면 더 좋을 것같구요. 초등 고학년 이상의 자녀라면 호젓한 시간에 반복해 읽기를 권유하면 좋겠습니다.
책장을 열면, 아흔네해 긴 생을 마감하려는 할머니의 가는 숨결이 호르륵 끼쳐옵니다. 뒷산 늙은 귀목나무를 올려다보며 한해 농사를 내다볼 줄도 아시던 할머니가, 살구나무 앵두나무가 꽃그늘을 던지는 춘삼월에 졸음에 빠지듯 그렇게 떠나시네요.
이 그림책은 죽음을 이야기하는데도 어둡거나 엄숙하지 않답니다. 할머니와의 영영 이별은 가족 모두에게 크나큰 슬픔이되 상(喪)을 치러내는 고비고비는 한바탕 축제마당입니다. 죽음이란 무르익은 삶의 아름다운 뒤끝임을 역설하는 거겠지요. 그 장면장면들이 꿈처럼 몽롱하고 신비롭기까지 합니다.“삶의 소란과 죽음의 고요가 엇갈리는 사이, 하루해가 맘껏 길게 지고 산그늘이 뒷산을 내려오자, 느티나무 까치집 그림자가 마당에 떨어졌다가 조용히 마당을 떠나 앞산을 넘어갔습니다.(…)”
좁은 관에 몸을 누이는 할머니를 보며 시인은 그 옛적 청상(靑裳)의 할머니의 한을 새삼 돌아다보기도 합니다. 상복에 건을 두른 상주, 시골집 앞마당의 꽃상여, 상여꾼들의 소란스러운 상엿소리….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연방 물음표를 날릴 사실묘사의 대목들도 많습니다.
까맣게 잊혀져가는 전통 상례의 풍속과 아련한 서정에 푹푹 발이 빠질 그림책입니다. 시시콜콜 뜻을 다 모르고 읽은들 또 어떨까요. 투명하고도 천진한 시인 특유의 시어들이 오롯이 흡수되면, 아이들 마른 가슴이 양껏 포옥 젖을 테니까.
상례를 돌아보는 틀거리 속에 기승전결 뚜렷한 서사구도가 돋보입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이야기 마당에 혼돈스레 휘둘리던 어린 독자들을, 책은 평온한 현실 속으로 되돌려놓아 줍니다. 할머니를 보내는 철부지 손녀딸들의 모습이 얼마나 평화로운지요.“천원어치는 되겄다야.” 소복 치맛자락에 푸른 봄나물을 뜯어 싸담는 아이들 모습이 봄볕 아래로 노곤히 감겨듭니다.
곰삭은 서정이 한됫박은 녹아든, 그저 가슴으로만 읽어도 좋을 책임에 틀림없습니다.1만 50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2006-02-11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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