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531)-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1)
수정 2006-02-02 00:00
입력 2006-02-02 00:00
제2장 居敬窮理(21)
즉 부처는 자신의 마음을 문자나 경전의 가르침과 같은 글자를 통하지 아니하고 오직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 오묘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는데, 만약 노승께서 진리의 본체를 색이니, 공이니, 진여니 하고 여러 가지 말이나 문자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불립문자(不立文字)의 범주에서 벗어나 문자 안에 있다는 모순을 범하게 되는 것이며,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오묘한 진리가 아니라 경전 속에 들어있는 문구를 인용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겠느냐는 통렬한 반격이었던 것이다.
율곡은 자신의 말에 대한 노승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노승은 깜짝 놀라 나의 손을 잡으며 말하였다.‘당신은 세속 선비가 아니로군요.’”
율곡이 쓴 시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율곡은 노승의 변론을 시험해 봄으로써 자신이 노승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세속 선비가 아닌 출중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화자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기야 이 시를 쓸 무렵의 율곡은 19살의 청년이었으므로 객기(客氣)를 부릴 만큼 패기만만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풍악산 작은 암자에서 솔잎을 먹으며 생식하고 있는 노승쯤은 얼마든지 한 방망이 후려쳐서 쓰러트릴 수 있다는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율곡의 나르시시즘은 이 시에서 하이라이트로 장식된다.
즉 노승이 율곡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선비는 나를 위해 시를 지어서 솔개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물속에서 뛰노는 그 글귀의 뜻을 해석해주시오.”
노승의 부탁에 율곡은 흔쾌히 이를 수락한다. 노승이 지필묵을 준비하자 율곡은 붓에 먹을 듬뿍 묻혀 종이 위에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일필휘지하기 시작하였다.
율곡이 노승을 위해 지은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물고기가 뛰놀고 솔개 나는 것은 위아래가 한가지라.(魚躍鳶飛上下同)
이것은 색도 아니고 공 또한 아니라네.(這般非色亦非空)
무심결에 한번 웃고 내 몸을 돌아보니,(等閒一笑看身世)
석양의 나무 숲 속에 홀로 서 있네.(獨立斜陽萬木中)”
율곡이 써준 시를 읽어본 노승은 이 시를 접어서 자신의 소매 속에 집어넣는다. 그러고는 벽을 향해 돌아앉아 면벽을 하였다.
더 이상 율곡과 대화를 하지 않고 침묵 속으로 들어가 수행하겠다는 자신의 뜻을 내보인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율곡은 그 암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장면을 율곡은 시 속에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나는 그 골짜기를 나오며 노승이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사흘이나 지난 뒤에 다시 그 골짜기로 가서 본즉 조그마한 암자는 그대로 있는데, 노승은 이미 떠나버려 암자는 텅 비어있을 뿐이었다.”
2006-02-02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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