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60 남북 화상상봉] “中1까까머리가 이렇게 늙다니…”
이효연 기자
수정 2005-08-16 07:22
입력 2005-08-16 00:00
늙은 아들의 얼굴을 화면으로 확인한 김 할머니는 “중학교 1학년 때 얼굴과 많이 달라 보인다.”며 마음아파했다. 어떻게 북한에 가서 살게 됐는지, 북한에서 가족은 어떻게 꾸렸는지, 엄마를 원망하진 않았는지, 할머니에게 그 길었던 질곡의 세월을 다 묻기에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안타까운 두시간이 지나고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자 할머니는 아들을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어 화면 속 아들에게 기약없는 작별 인사를 하고는 눈물을 훔쳤다.
8남매를 둔 김 할머니가 5남매와 생이별을 한 것은 6·25전쟁이 터진 1950년 가을이었다. 표선면에 살았던 할머니는 호남씨를 포함해 5남매를 일본으로 보냈다.
할머니는 그때를 스산한 바람이 불던 늦가을로 기억한다. 먹고 살기 어려운 전쟁통에 밥이라도 배불리 먹이자는 생각에 남편(현경림)이 있는 일본으로 아이들을 잠시 보낸다고만 생각했다.8남매 모두 일본에서 낳아 길렀기 때문에 이것이 자식들과의 마지막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제주도가 고향인 할머니는 1930년대에 먹고 살 길을 찾아 남편과 일본으로 건너갔다.
남편은 오사카 부근에 철근공장을 차렸고, 자식들을 낳아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일본은 생지옥이 돼버렸다. 남편은 홀로 남아 공장을 지키기로 하고 할머니와 8남매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지만 8남매를 먹여 살리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나이 어린 3남매는 자신이 데리고 있고 큰딸, 큰아들 등 5남매는 일본에 다시 보냈다.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호남씨 등 5남매는 밀항선을 타고 일본 땅을 다시 밟았다.
가끔 연락을 주고받으며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55년 어느날, 남편의 죽음이 찾아왔다.5남매와의 연락도 그길로 끊겼다.
뽀얀 피부, 작은 얼굴,‘中’자 마크의 교복 모자를 쓴 아들이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만 같아 자신도 모르게 문밖을 내다봤던 지난 55년이었다. 일본 교포들을 통해서 큰아들과 둘째딸, 셋째딸은 북한으로 갔고 첫째딸과 다섯째아들은 일본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큰아들이 살아있음을 확인한 것은 지난달. 제주도에 남았던 딸 명자(65)씨가 3년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한적십자사에 가족들의 생사를 물었고 호남씨와 산옥씨의 생존 사실을 확인했다.
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2005-08-16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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