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재앙, 인간/프란츠 부케티츠 지음
수정 2005-01-08 00:00
입력 2005-01-08 00:00
처음엔 ‘이렇게 극단적이고 병적인 비관주의적 사고의 소유자가 있을까.’ 하고 저자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번득이면서 책장을 넘겨보지만, 거부하기 어려운 논리에 의문부호를 하나씩 내주다 보면 결국 남는 것은 가슴 가득 차오르는 답답함뿐인 걸 어쩌랴.
●진화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의 연속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사실 인간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인류의 진보를 종교처럼 떠받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비례해 살육의 기술과 규모를 키우는 인류의 광기, 개발과 물질만능 뒤안의 환경파괴와 그로 인한 자연재앙들만 보아도, 진보는 허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지워버리긴 어렵다.
책이 시작되자마자 저자는 묻는다. 최초의 인간이 석기나 맨손으로 짐승을 사냥하고 열매를 따먹다가 현대인이 슈퍼마켓에서 포장된 음식을 구입해 요리해먹게 된 것을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이 과학기술 문명의 혜택을 누린다는 이유만으로 석기시대의 선조들보다 나은 인간이라가 말할 수 있는가.
이 책은 생물학적 진화와 사회문화적 진화 영역에서 진보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했는지를 해부하고, 이를 통해 진보사상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여지없이 파헤친다.
먼저 생물학적 진화를 과연 진보와 발전의 개념으로 연상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기생생물의 예를 들어 밝힌다. 바다에 사는 게에 기생하는 주머니벌레는 유충때 자유롭게 바닷속을 떠다니다가 숙주인 게의 몸속으로 구멍을 뚫고 들어간다. 일단 들어가면 눈과 다리, 신경조직은 완전히 퇴화하여 사라지고, 대신 앞쪽 끄트머리에서 가느다란나 관들이 나와서 벌레 자체가 생식선화한다.
이처럼 기생생물은 진화가 오로지 진보와 발전이 아닌 퇴행도 함을 잘 보여준다. 생물이 고도로 진화해 탄생했다는 포유류중 하나인 개 1마리에 얼마나 많은 기생생물이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진화에서 진보와 상승발전이 핵심이라는 주장은 정말 터무니없다는 것이다.
●수많은 생물종들이 진화하다 멸종
지은이는 생물들의 진화는 근본적으로 크고 작은 재앙들의 연속이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지구가 생긴 이후 수많은 생물종들이 진화하다가 멸종의 재앙을 맞았으며, 이는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 만일 진화과정에서 중단 없는 진보가 존재한다면 이같은 재앙들을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은 그 자체가 자연사에서 발생한 갖가지 재앙들의 한 결과물일 뿐이다. 한데도 그러한 사실을 잊은채, 지구상의 어떤 동물보다 더 나은 지식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진화를 점점 더 큰 재앙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인간은 여전히 자연의 폭력 앞에 미약하고 무력한 존재이며, 정교하게 발달한 과학기술에도 불구하고 대규모의 자연재앙에 속수무책일 뿐이다.
지금까지 멸종을 맞은 수많은 생물, 아니 우리 선조인 구석기인들만 해도 막대한 재앙을 일으킬 능력이 애초에 없었지만 현대인 즉 ‘연미복을 입은 석기시대인’은 진보의 기치를 높이들고 대량소비와 환경파괴란 폭탄을 짊어지고 재앙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의 재앙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회문화적 진화는 진보성을 띠고 있는가. 지은이는 이 또한 단호히 거부한다. 진보의 증거로 내세우는 문명은 오히려 인간의 원시적 습성과 행위 충동, 즉 파괴본능을 더 조장한다. 파괴본능으로 무장한 인간의 원시적 행위 충동들이 쉽게 발현될 수 있도록 특별한 삶의 조건들을 만드는 것은 다름아닌 문명인 것이다.
그 노골적인 예가 바로 국가간의 전쟁이다. 구석기시대의 무리들이 생존을 위해 사냥감을 놓고 싸움을 벌였다면, 현대 국가들은 이데올로기적 이유로, 국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는 이유로, 혹은 세계를 지배해야겠다는 신념으로 전쟁을 일으킨다. 문명화 과정은 오히려 갖가지 도구들의 축적과 함께 인간의 폭력적 잠재력을 체계적으로 확장시킨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문명은 인간의 파괴본능 되레 조장
이 책은 만물의 영장을 자임하고, 지구의 주인으로 행세하면서도 지구의 황폐화를 향해 달려가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국제적으로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까지도 헛된 희망을 땅에 묻어버리라고 독자들에게 요구한다.‘인간이 우주조차도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는 오만을 버리고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한 곳에 사는 털없는 원숭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재앙을 향한 발걸음을 최소한 늦출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오만과 광기로 점철된 지난 역사를 돌이켜볼 때 이 또한 헛된 희망일 듯싶다.1만 8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2005-01-08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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