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86)-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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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4-05-05 08:04
입력 2004-05-05 00:00
제3장 至治主義
평소에 한빙계(寒氷戒)를 지어놓고 ‘불망어(不妄語)’,즉 ‘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는 계율을 철저히 지켜나가던 스승 한훤당은 그러나 그로부터 6년 뒤 순천의 시장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약을 먹고 사사당한다.
바로 그 순간 매계의 시신도 고향 금산에서 관이 쪼개져 참시를 당해 사흘이나 장사를 지내지 못한 것처럼 스승 한훤당의 시신도 시장거리에서 사흘간이나 거적에 둘둘 말린 채 방치되었으니,한갓 망령된 말이라고 무시하였던 한훤당의 운명도 결국 요동의 점쟁이가 내린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린다.’는 점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아닐 것인가.
그것이 불과 15년 전.
그렇다면 조광조의 운명도 매계는 물론 스승 한훤당의 비극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을 쓴 사람은 누구입니까.”
양팽손이 조광조를 쳐다보며 물었다.
“갖바치네.”
조광조가 대답하자 양팽손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갖바치라면 피장이 아닙니까.일개 피장이가 어찌 신명의 뜻을 알겠습니까.”
“하지만 매계에게 점괘를 내린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미천한 일개 복자가 아니었던가.”
“너무 심려치는 마시옵소서.”
양팽손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였다.
“매계도 천층 물결 속에서 몸이 뒤집혀 나와 일단 생명은 보존하였으며,대감께오서도 일시 재앙의 화를 면치 못하시지만 천층 물결 속에서 헤엄쳐 나와 곧 주상의 부르심을 받고 환향하게 되실 것이나이다.”
“하지만.”
여전히 갖바치가 만든 태사혜를 신은 채 조광조가 말하였다.
“이 말의 뜻은 여전히 무슨 뜻인가 알 수 없지 않은가.”
조광조는 갖바치가 쓴 마지막 문장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천년의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매계는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려야 했는데,그렇다면 나는 바위 밑에서 천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 아닐 것인가.”
이 말을 들은 양팽손이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일찍이 채소권(蔡紹權)도 의복과 관대에 마음을 쓰지 않아 한 쪽 발에는 검은 신을 신고,한 쪽 발에는 흰 가죽신을 신고 다녔다고 하더이다.이를 본 김안로(金安老)가 ‘꽃 빛이 짙고 옅은 것은 다만 먼저 되고 후에 된 것뿐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소이까.”
양팽손의 말 역시 김정국이 지은 ‘사재척언(思齋言)’에 실린 이야기 중에 하나이다.
채소권은 권신 김안로의 처남이었으나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아 훗날 김안로가 흉적으로 참화를 입을 때 무사할 수 있었던 문신인데,그는 천성이 부드럽고 탄솔(坦率)하였다고 한다.‘사재척언’에 의하면 채소권은 조금도 의복과 관대에 마음을 쓰지 않았는데 어느날 아문에 출사하면서 한 쪽 발에는 흰 가죽신을 신고 한 쪽 발에는 검은 가죽신을 신고 가니,아전들이 입을 가리고 서로 웃었다고 한다.근무를 마치고 자신의 매형인 김안로를 만나자 이를 본 김안로가 크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꽃 빛이 짙고 옅은 것은 다만 먼저 되고 후에 된 것뿐이다.”
김안로의 말은 ‘꽃이 필 때 어떤 빛깔은 진하고 어떤 빛깔은 옅은 것은 다만 먼저 나고 뒤에 나오는 차이뿐 꽃은 꽃일 뿐이다.’라는 말로 처남 채소권의 소박한 심성을 꽃의 아름다움으로 칭송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오니 대감께오서 한쪽 발은 검은 가죽신을 신고,한 쪽 발에 흰 가죽신은 신은 것은 김안로 대감의 표현대로 꽃 빛이 옅고 짙은 차이뿐 다른 뜻은 없을 것입니다.”
양팽손은 짐짓 조광조를 위로하기 위해 가볍게 말을 흘렸다.
2004-05-05 4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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