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덫’ 은행원의 눈물
수정 2004-04-30 00:00
입력 2004-04-30 00:00
신용불량자 400만명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암울한 묵시록이다.
시중 한 대형은행의 여의도 지점에서 기업들을 상대로 여신·대출 업무를 담당하는 과장이자 세 자녀의 아버지인 백모(39)씨.그는 과장으로 승진한 지 한달 만에 근무하던 지점에서 5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29일 구속됐다.금융 전문가인,15년 경력의 은행원도 ‘카드빚 탈출’에 결코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난 백씨는 “은행원이라서 카드의 생리를 잘 안다고 자신했지만 내 자신을 파멸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백씨는 “지난 3년 동안 죽도록 일하면서도 20장의 카드로 돌려막기를 하며 살아야 했던 지옥 같은 생활이 끝나 차라리 후련하다.”고 말했다.
●카드 연체이자만 1억 7000만원
백씨는 5년 전부터 카드를 하나둘씩 발급받기 시작했다.지점 선·후배 간에 관행처럼 이뤄지던 후배에 대한 빚보증 2000만원도 카드 대출로 해결했다.주식투자를 위한 종자돈과 부족한 용돈도 카드 현금서비스를 통해 마련했다.직업이 은행원이어서 카드의 신용대출 한도가 일반인보다 월등히 높은 3000만원이었다.
그때까지 백씨는 자신이 카드를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었다.보너스를 받아 정산을 해 이자도 많지 않았다.하지만 카드가 늘어날수록 씀씀이도 커졌다.2001년 백씨의 지갑 속에 든 신용카드가 20장으로 늘어났다.백씨가 지난 5년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고 쓴 돈만 2억 2000만원.하나 둘씩 연체가 되자 연 20%가 넘는 이자가 달라붙기 시작했다.5년 동안 백씨에게 날아온 이자만 1억 7000만원.백씨는 “이자를 갚아도 갚아도 안 됐고 집이나 직장에 말도 꺼내지 못한 채 혼자서 고민했다.”면서 “한순간에 미쳤다.”고 후회했다.
●“카드빚 탈출은 불가능했다”
백씨는 기자에게 “카드가 무섭다.한번 이자가 무섭게 붙기 시작하면 내 능력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결제일마다 현금서비스로 이자를 막다가 한도가 차면 다른 카드로 다시 현금서비스를 받아 메우는 식이다 보니 나중에는 원금은커녕 이자만 돌려막는 악순환이 계속됐다는 것이다.결국 막다른 골목에 몰린 백씨는 고율의 이자가 부과되는 캐피털과 사채 사무실의 문까지 두드리는 신세가 됐다.절망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예금청구서 위조해 5억원 출금
서울 모 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한 백씨는 1989년 한 시중은행에 입사했다.백씨는 98년 자신이 다니던 은행이 합병된 후 정리해고의 광풍에서도 살아남았다.
깔끔한 업무처리 능력을 인정받은 것.지난달에는 과장으로 승진,노른자위인 여의도 지점에서 여신·대출을 담당했다.백씨는 지난 22일 예금청구서를 위조해 은행에서 보관하던 5억원을 동서 명의로 개설한 통장에 입금했다.백씨가 직접 전산에 정상 대출로 입력해 직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백씨는 입금된 5억원 가운데 3억 9900만원을 곧바로 인출,카드빚을 갚는 데 썼다.
백씨의 범행은 그러나 이날 저녁 지점 결산을 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백씨는 지점장에게 범행을 실토했고 26일 지점장과 함께 경찰서에 출두할 때까지 나흘 동안 본점 검사부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백씨는 영장실질심사에서 “카드 이자 갚을 날짜가 다가오자 초조함에 은행 돈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금융 전문가들은 현재 카드 돌려막기로 버티고 있는 잠재적 신용불량자만 300만∼400만명으로 추산된다고 지적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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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30 4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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