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포대기/가족간의 갈등·화해 그린 공선옥의 장편소설
수정 2003-02-07 00:00
입력 2003-02-07 00:00
최근 장편소설 ‘붉은 포대기’(삼신각 펴냄)를 낸 중견작가 공선옥(사진·40).그는 먹고 사는 일에 숨가빠 우리 세대가 깜빡 잊고 살아온,낡았으되 그래서 더 많은 사연이 땟국으로 전 포대기 하나를 꺼내들었다.붉은색의 낡은 무명 포대기에서는 금세 달고 시금한 젖냄새와 함께 따뜻한 정감의 보푸라기가 인다.
그는 고작 속곳 한 벌 겨우 오릴 만한 포대기에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사랑’을 패치워크처럼 그려넣는다.참담한 아픔을 거쳐서야 다다를 수 있는 ‘피안(彼岸)의 휴식’ 같은 사랑이다.
작품은,어머니의 병수발을 위해 시골집에 불려 내려온 인혜의 뇌리에서부터 풀어진다.실패한 사랑을 병으로 앓다가 어느새 훌쩍 삼십대를 넘긴 그는 암을 앓는 어머니와 치매의 할머니,그리고 정신지체의 동생 수혜를 돌봐야 하는 현실 앞에서 ‘사는 일의 막막함’에 적잖이 힘겨워한다.
가족을 향한 그의 ‘이기’와 ‘몰이해’는,자신을 ‘막막한 상황’ 속으로 끌어들인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버무려져 사랑의 기억 때문에 신열이 들끓는 그의 가슴에서 가늠하지 못할 불신으로 증폭된다.이런 인혜의 아픔에 ‘임신한 동생 수혜의 상황’이 덧밥처럼 얹히면서 가족들의 갈등은 인화점을 향해 치닫는다.
작가는 작품을 결코 도식적으로 이끌지 않는다.가족소설의 형식을 가졌으면서도 결코 단선적이지 않다.인혜와 수혜,상처한 아버지가 재취로 들여앉힌 어머니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인물과 상황을 중층으로 대립시켜 ‘누구라도 그럴 것’이라고 여길 만한 정직한 갈등을 생산해낸다.바로 작가 공선옥이 가진 문학적 도덕률이자 역량이다.
이를테면,인혜는 동생의 임신과 임신을 초래한 수혜의 사랑을 따로 떼어내 문제를 수습하려는 가족들의 시각을 “가족 혹은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한 장애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으로 규정한다.물론 이런 인혜의 깨달음은 죽은 어머니의 ‘곰살맞은 사랑’이 준 고귀한 선물 같은 것이다.
불구인 딸의아픔을 이해하고 어렵게 태어날 손자를 위해 생전에 어머니가 쓰던 반닫이에서 포대기를 찾아내는 아버지와,그런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흉금의 눅눅한 우울이 일순간 환하게 펼쳐지는 것 같은 기쁨을 느끼는 인혜.결국 포대기는 이들의 사랑을 확인해주는 정표가 되고 상징이 된다.
또 전처가 남긴 두 자식을 싸안아 키웠던 포대기로 다시 수혜의 아기를 감싸안는 새어머니의 모습은 ‘개자식’이라는 육두문자까지 내뱉으며 불화했던 가족들의 서슬을 이내 따뜻한 속살로 풀어낸다.작가는 이처럼 ‘사랑’과 ‘가족’을 씨줄과 날줄로 해 인혜 자매가 가는 삶의 도정을 담담하면서도 가슴 뭉클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가 공선옥에 대한 문단의 평가는 “얄캉한 기교에서 한 두 걸음 물러서 담백하고 솔직하게,그러면서도 모든 상황을 당당하게 그려내는 작가”라는 것이다.‘붉은 포대기’는 이런 문단의 평가에 부합하는 작품이다.어디에도 애써 읽는 이의 감동을 쥐어짜려는 선동은 보이지 않는다.이런 무기교의 담담함이 주는 감동은 필경 생명력이 오랠 것이라는믿음,빛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때깔을 지우지 않는 공선옥의 힘으로 남는다.
춘천에 기거하며 글쓰는 일에만 몰두한다는 그는 “가족의 이름 혹은 핏줄이라는 이유로 시시콜콜 간섭하고 때로는 억압하고,더러는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포대기 정신’의 한 편린일 수 있는 것”이라며 “유모차 등 온갖 유아용품이 넘쳐나지만 사지를 결박당해 들쳐업혀도 마냥 포근하기만 했던 포대기의 웅숭한 사랑을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심재억기자 jeshim@
2003-02-07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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