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北 변화는 ‘막다른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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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2-09-20 00:00
입력 2002-09-20 00:00
극적으로 실현된 북·일 정상회담은 역시 충격적이고 이례적인 내용으로 나타났다.납치사건의 전면적 인정과 사죄,과거청산의 경제협력방식 수용.정상회담과 ‘북·일 평양선언’은 북한의 전면적 항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남북관계,북·미 교섭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납치사건의 충격속에서 여론이 강경화되는 상황속에서 북·일 교섭은 순조롭게 타결될 것인가?

가장 주목을 끈 것은 역시 납치사건의 전면적 인정과 사죄다.체제의 근간을 뒤흔들지도 모를 민감한 문제에 대한 최고지도자의 ‘결단’이 북·일 국교정상화를 조속히 실현하려는 강한 의사와 함께,절박한 사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은 다시 지적할 필요도 없다.그러나 이 문제는 북·일 관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한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납북자,억류자 문제,대한항공기 격추사건,양곤사건 등 잠재적으로는 엄청난 파급력과 충격력을 지닌 폭탄이다.

이와 더불어 이번 북·일 정상회담에 이르는 북한의 교섭태도에서는 단기타결을 향한 포괄적인 대타협의 결단이 두드러진다.종전처럼 시간을 끌면서 조건투쟁을 구사하는 전략은 자취를 감추었다.조건투쟁에 집착한 결과,많은 기회를 상실하고 스스로 어려움을 자초한 과거의 경험에서 오는 학습효과인지도 모른다.필자는 이러한 경향이 대일교섭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한국,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본격적으로 전개될 것으로 예상한다.그만큼 북한은 이번이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이며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북·일 교섭이 본격화와 때를 맞추어서 남북관계에서도 경의선,동해선 철도연결이라는 상징적인 면에서,또한 실질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진전을 보여줬다.곧 이루어질 제임스 켈리 미국무차관보의 방북을 계기로 북·미 교섭도 조만간 재개될 것이다.

성급한 추측이지만 가장 큰 난관인 제네바 핵협정에 따른 핵사찰을 수용하는 ‘결단’의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핵사찰이라는 ‘가시’만 제거된다면 부시 행정부내 매파의 공세도 근거를 잃게 된다.김정일 위원장이 고이즈미 총리에게 제네바 협정의 지체에 따른 보상을언급한 점도 주목을 끈다.보상은 충분히 교섭가능한 쟁점이며 교섭을 요구하는 개념이다.

북·미 교섭에 대한 단순한 낙관론을 전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북·일 교섭의 단기타결이라는 목적달성을 위해서 북·미 교섭,나아가 남북관계의 진전이 불가분의 조건이라는 현실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부시 행정부내의 격렬한 정책논쟁과 힘싸움의 결과,국무부의 온건파는 우선 켈리 차관보의 방북과 교섭재개를 획득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여전히 부시 정권의 주도권은 매파에 있으며,이들의 대북한 태도에 커다란 변화가 있다는 징조는 없다.다만 이들도 당면 목표인 이라크에 대한 집중,양면작전의 부담을 회피하기 위한 전략적 소강상태의 필요,한국 및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내의 예상외 반발과 우려 등을 고려해서 온건파의 행동을 묵인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

이번 북·일 교섭을 위한 북한의 양보가 대미 교섭의 카드라는 관측도 있다.그러나 일본이 특히 핵문제에 있어서 대미 카드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만약 핵사찰문제로 북·미 교섭이 난관에 봉착한다면,납치사건의 전면적 인정이라는 기사회생의 ‘결단’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고이즈미 방북에 대한 일본 국내의 반응은 두 갈래로 분열되어 있다.납치자 대부분의 사망이라는 비극의 충격파는 예상을 초월하는 강경론으로 여론을 몰고 있다.

당일 저녁에 오사카에서 조총련계 학생에 대한 폭행사태가 일어난 것에서 보듯이 그 배경에는 뿌리깊은 북한 위협론과 차별의식이 존재한다.

정략적 관점에서 이러한 감정적 반응을 부채질하는 정치가들도 적지 않다.그러나 근래에 보지 못한 일본의 ‘외교적 성과(승리)’에 대한 만족감이 서서히 이성적 반응으로 변화를 유도할 것이다.‘전면항복’한 북한에 더 이상의 채찍질이 초래할지도 모를 반작용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북·일 평양선언’의 제4항에서 북한은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안전보장문제에 대한 일본의 참여와 적극적 역할에 대해 공식적으로 동의했다.역사적으로 커다란 전환점이기도 하며,한국의 입장에서도 그 향후 방향성과 내용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이다.

이종원 일본 릿쿄대 교수
2002-09-20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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