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농정 현장을 가다] (10.끝)영동화훼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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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2-08-05 00:00
입력 2002-08-05 00:00
영동화훼조합은 ‘수출영농’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는 곳이다.3년여전만 해도 수출을 위해 사방으로 수소문을 해야 했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앉아서 손님들을 맞는다.그 비결은 강원도에서 처음으로 시작했던 ‘양액(養液)재배’다.현재 대표를 맡고 있는 최명식(崔明植·46)씨 등 동네 화훼농민 5명이 조합을 결성한 것은 1995년.단지(團地)를 만들어 규모화 하지 않고서는 미래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했다.재산을 탈탈 털고 농협 융자까지 받아 각자 2억원씩 출자,6000여평 규모의 화훼단지를 차렸다.
장미 국화 백합 글라디올러스 유색칼라 등 10여가지 꽃을 정성껏 길러냈지만 기대만큼의 ‘시너지효과’는 나오지 않았다.꽃의 질이 수출할 정도가 안된 탓이었다.일본 등 해외시장 공략이 안되다보니 규모가 뻔한 국내시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그런 와중에 맞은 97년 말 외환위기.국내 소비심리가 얼어붙으면서 꽃값은 바닥으로 떨어졌고,수입에 의존하던 종자값은 하늘로 치솟았다.융자금 이자까지 나날이 불어나면서 사업을 계속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최씨 등이 마지막 승부수로 띄운 것이 ‘양액재배’ 농법이었다.지금은 전국 화훼농가의 50% 가량이 양액재배를 하고 있지만 당시 98년초만 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대모험이었다.흙을 모두 퍼내고 양액설비를 갖추는 데 다시 어마어마한 돈이 들었다.몇몇 농가는 강하게 반대했다.
이렇게 시작된 강원도내 첫 양액재배는 상상 외의 성공을 가져왔다.흙이 없으니 병균이나 해충이 들끓지 않아 꽃의 상태가 깨끗했고,알짜배기 영양분만 흡수하다보니 싱싱함과 화려함을 갖출 수 있었다.토양재배 때에는 전체 수확량의 10% 밖에 수출하지 못했지만 양액재배 이후에는 60% 수준으로 뛰었다.
수출은 여전히 늘고 있다.지난해 5만송이였던 장미 수출은 올해 10만송이를 넘길 것으로예상된다.하지만 아직 어려운 점은 있다.종자와 양액을 절반이상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원가 부담이 높은 편이다.정부기관 등의 효율적인 화훼수출 지원도 아쉽다.최 대표는 “물류비용이 높은데다 수출이 규모화·체계화되지 못한 상태”라면서 “정부 등이 종합지원 시스템을 갖춰준다면 일본·중국을 벗어나 미주·유럽으로도 수출이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강릉 김태균기자 windsea@
2002-08-05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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