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굄돌] 밤을 빼앗긴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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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2-06-06 00:00
입력 2002-06-06 00:00
집을 나섰습니다.여행은,떠나는 것이 아니라 먼 옛적 우리가 떠나온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인류의 옛 조상이 그러했듯이 우리들도 원래는 모두가 자연에서 태어난 네 발 가진 야성의 동물이었습니다.그러나,너무 오랫동안 자연을 떠나 인위적인 환경과 도시적 삶에 젖어버렸기 때문에 자연으로 가는 길이 마치 낯선 곳을 찾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지요.

생태기행은 우리들 마음 깊은 자리에 잠들어 있는 야성(野性)을 일깨워 우리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자연에로의 여행입니다.완행열차에서 내린 충청도 어느 소읍.바꿔타야 할 막차는 놓쳐 버렸지만,시골 저녁길을 걷는 즐거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나,찾아가야 할 바다마을까지 삼십리길이 안타깝게도 포장되어 있었습니다.포장도로는 비포장 흙길보다 걷는 데 더 힘이 듭니다.포장도로는 자동차와 같은 기계의 길일 뿐,사람의 길로 만든 게 아닙니다.

우리들의 발바닥 구조부터가 그렇지요.발은 본래부터 포장도로가 아니라 비포장길에 맞게 조물주가 설계해 내놓은 것입니다.

얼핏 보면 편리해 보이지만,우리 몸뚱아리 요소요소가 그 기계적인 편리에 맞추기 위해 얼마나 곳곳에서 속앓이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한쪽이 편리해지면 어느 한쪽은 불편해지는 것이 우주의 법칙입니다.도로 옆 들판은 상추를 키우는 비닐하우스들로 온통 뒤덮여 있습니다.해가 저물자,이윽고 농부들이 들판의 상추 비닐하우스를 돌아다니며 전등을 켜기 시작합니다.밤새도록 켜놓을 전등입니다.

요즘 들녘은 전에 보지 못했던 희한한 불야성이 펼쳐집니다.상추 농사는 꽃이 피면 끝장입니다.꽃이 피면 상추잎이 더 이상 자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등불을 켜놓으면 상추들은 낮인 줄 알고 쉬지 않고 자랍니다.그래서 농부들은 더 많은 상추잎을 따기 위해 상추가 꽃을 피우지 못하도록 밤새껏 하우스 안에 불을 켜두는 것입니다.모든 생명들은 밤이 있어야 합니다.어두운 밤을 지나온 것만이 참생명입니다.하지만,시중에 나온 상추나 깻잎들은 그렇게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웃자란,가여운 반생명들이지요.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저 겉모양만 보고 싱싱하다고 합니다.과학영농,인간들의 또다른 교활입니다.깊어가는 시골의 밤,들길을 걸으며 상추들의 길고 힘겨운 불면(不眠)의 밤을 생각합니다.밤을 빼앗긴 생명들을 위해 오늘 이 한밤은 함께 뜬눈으로 걸어가려고 합니다.

김재일/ 두레생명문화硏 대표
2002-06-0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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