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주기자의 교육일기] 성적의 ‘포로’가 된 인생 행로

  • 기사 소리로 듣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공유하기
  • 댓글
    0
기자
수정 2002-04-04 00:00
입력 2002-04-04 00:00
여섯살배기 큰 딸 현주는 보름전부터 발레학원에 다닌다.

어찌나 좋았던지 학원에 가는 첫날,하루종일 발레슈즈를신고 다니고 학원가방을 어깨에 멘 채로 밥을 먹었다.

6개월 전부터 시작된 발레 타령을 그동안 ‘저러다 말겠지’하고 모른 척했다.엄마로서 미안한 얘기지만 솔직히우리 딸은 ‘춤꾼’기질은 없어보인다.춤출 때면 나무토막처럼 뻣뻣하다.

덕분에 한 달에 8만원이라는 부담이 더 생겼어도 아이의행복한 표정을 보니 나도 흐뭇하다.발레에서 재미를 느끼든,좌절을 맛보든 딸 아이는 그렇게 슬슬 자기의 적성을찾아나가는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리라.

한편으로는 딸이건만 솔직히 샘이 나기도 한다.이른바 ‘컨츄리’ 출신으로서 발레는 ‘딴나라’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어릴 때 집안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탓에 학원들을다니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미술시간이나,무용시간에는 괜스레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슬그머니 좀 억울해진다.무심코 흘려보낸 그 시간이 숨겨진 재능을 탐색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는데 말이다.조건이 갖춰졌다면 지금쯤또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지 누가알겠는가.

경제적인 이유든,사회적 상황에 의한 선택이든 이런 아쉬움은 아마도 나만의 경우는 아닐 것이다.우리나라는 대학뿐 아니라 학과까지도 수능점수로 줄을 선다.우등생들은무조건 의대,법대로 향하고 학부모들도 서울대·고대·연대 등 ‘스카이(SKY)’를 보내는 데 목매는 현실에서 적성을 찾아 살기란 보통 용기로선 힘들다.

영화,음악쪽에 꽤 재능이 있었던 한 후배는 고3때 ‘고만고만한’ 대학의 예술학과를 지망했다가 엄마로부터 “너미쳤니?.니 점수가 아깝다.”는 꾸지람을 듣고 포기했다며 한숨을 지은 일이 있다.

다양한 진로 선택을 터준다는 취지로 시작한 ‘문·이과교차지원’조차 여러 이유로 올해부터 문이 닫혔다.고교에서도 학과점수 올리는 보충수업에는 열을 올리면서 정작인생 행로를 좌우하는 진로 지도는 외면하고 있다. 얼마전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전국 고교생들을 조사한 결과,자기 적성을 확실히 알고 있다고 답한 학생이 14%에 그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대부분 직업이라는 ‘삶의 텃밭’을 갈며 살아간다.좋아하는 일을 하면 생계와 자아실현이라는 결실을 거둘 수 있지만,점수만 따져 적성을 팽개친 사람들은 평생퍽퍽한 땅만 갈다가 지쳐갈 지도 모른다.

남들의 이목과 겉만 번지르르한 신기루에 매달리는 우리사회,불행한 인간들을 낳는 산실(産室)이다.

허윤주기자rara@
2002-04-04 18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에디터 추천 인기 기사
많이 본 뉴스
원본 이미지입니다.
손가락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확대해 보세요.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