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굄돌] 다음 數를 읽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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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0-02-23 00:00
입력 2000-02-23 00:00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막내 아이가 수학 시험을 봤다.아이는 두 문제를틀렸다고 말하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시험을 잘 치르지 못해 미안한 표정도 아니었고,부끄러운 표정도 아닌 것이 뭔가 어정쩡하였다.아이가 그런 표정을 지은 까닭은 틀린 두 문제중 한 문제 때문이었다.그 문제는 이랬다.

‘다음 수를 읽어보시오.’라는 질문 밑에‘69 - ( )’가 적혀 있었다.문제 출제의 의도는 분명한 듯하다.69라는 아라비아 숫자를 읽고 괄호 안에다가읽은 숫자를 우리말로 쓰는 것이다.학교가 제시한 정답은 ‘육십구’다.그런데 아이는 괄호 안에다 ‘칠십’이라고 적어서 틀렸다.그것도 ‘육십구’를지운 흔적이 역력한 채 말이다.아이는 69가 ‘다음 숫자’인지 69 다음에 나오는 70이 다음 숫자인지 계속 고민하다가 후자를 선택하여 우리말로 썼다한다.물론 아이의 논리를 따른다 해도 69 다음의 숫자가 반드시 70인 것만은 아니며,어떤 숫자라도 가능하다.다만 수 가운데서 자연수를 익히고 있는 1학년생으로서는 자연스레 70이 떠올랐을 것이다.과연 아이의 답은 틀린 것일까.

1학년 교육과정에‘수 읽기’의 단원이 있다고 한다.교육과정의 연장선상에서 시험을 치르는 것이므로 문제가 ‘다음 수를 읽어보시오.’라고 나오면,여기에는 주어진 숫자를 읽고 우리말로 쓰시오라는 너무도 당연한 전제가 깔려 있다.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아래의 숫자를 읽고 괄호 안에 우리말로 쓰시오.’라고 문제를 정확하게 제시하지 않았다면,미성숙하고 상식밖의 사고가 충분히 가능한 아이의 입장에서 볼 때 ‘칠십’을 쓰는 것은 논리적으로 틀린 것이 아니다.오히려 ‘육십구’만이 정답이라고 당연시하는사고가 더 문제가 될 수 있다.

개방된 문제에 대해 하나의 관점과 하나의 정답만을 요구하는 것은 사고의다양한 관점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사고를 경직되게 하고 일방적으로 강요하여 획일화하기 쉽다.

특히 대상이 어린 아이일 경우 자기 나름대로 사고가 논리적이고 적절했음에도 불구하고,자기검열을 통해 자신의 사고 방식을 무조건 제거한 다음 ‘육십구’만을 정답으로 요구하는 사고를 맹목적으로 따르기 쉽다.순진하게도다음 시험에 또 틀리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홍창수 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2000-02-23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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