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그늘(통독4년의 명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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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4-12-12 00:00
입력 1994-12-12 00:00
◎황병선정치2부장의 현장취재/통일 「신이 준 완성품」 아니었다/임금·생활수준 큰 차… 동,「2등시민」 설움/「동」실업률 15%… 「서」의 갑절/임금75%·생산성40% 불과/한해 75조원 투자… 15년 지나야 같은 수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5년,그리고 분단 45년에 역사적 종지부를 찍은 동서독 통일이 이뤄진지 만4년.그러나 독일의 통일은 어느 날 신이 완성품으로 내려준 선물은 아니었다.

오는 2000년 수도로 「복위」케 돼있는 베를린과 아직 수도기능을 하고 있는 본,그리고 구서독지역의 쾰른 프랑크푸르트 뮌헨,구동독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등 통독 4년의 현장을 2주간 취재하며 자연스레 얻은 결론은 통일이 90년 10월 3일 완성형으로 이뤄진게 아니라는 것이었다.통일이 선포된 그날은 다만 동구의 와해라는 세계사의 물결에 따라 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열리면서 시작된 독일 통일장정의 공식 출발을 알린 날이었다.

그후 4년,8천만 독일국민은 예상됐던,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예기치 못했던 과업들과 씨름해가며 통일을 완성시켜 나가느라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그들은 통일직후의 환희와 낙관,혼란의 시기가 지나면서 마주치기 시작한 「통일의 그늘과 부작용」에 실망하고 있었다. 불만을 토로하는데는 동서독 출신의 구분이 없었다.

연방정부 관리와 주의회 관계자·언론인·전문가들을 인터뷰한 결과를 종합할 때 상이한 이데올로기와 체제아래 살아온 지난 반세기를 극복하고 통일을 완성시키기까지 게르만민족의 고달픈 장정은 십수년은 더 계속될 전망이었다.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어려움과 불만을 토로하고는 있지만 통일은 확고한 궤도에 진입해 있었다는 것이다.89년 10월 동독인들의 자유와 풍요 그리고 민주주의를 향한 염원이 10만 군중의 「월요시위」로 폭발,한달후의 베를린 장벽 붕괴를 촉발시킨 역사의 현장 라이프치히 중심가 카를 마르크스광장.이제는 아우구스투스 광장이란 동독공산당정권 이전의 옛이름과 평화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광장을 바라보며 자리잡은 유서깊은 음악당 게반트하우스에선 연말 정기 교향곡연주회가 열리고 있었다.객석에는 주로 노부부들의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고 공연장은 무덤덤 할뿐 음악을 즐기는 활기에 넘친 분위기는 아니었다.특히 생기없는 얼굴표정들 때문인듯 했다.또 음악당밖 분수대 곁의 침침한 가로등 아래선 청년 3∼4명이 가슴에 맺힌 불만의 표출인양 지나는 행인들을 향해 간간이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라이프치히시청의 볼프강 프링켈씨(시장 비서실장)는 동독지역에서는 경제적으로 가장 앞서가는 편인 라이프치히의 이런 어두운 얼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각해보세요.새로운 정치체제 그리고 서독과 같은 생활수준향상이란 꿈에 잔뜩 부풀어있던 동독지역 사람들에게 돌아온 것은 갑자기 2등국민이 돼버렸다는 실망감이었습니다.좋은 상품이 있으면 뭘합니까.직장과 돈이 없는데.전체적으로 생활수준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바로 행복을 보장해주진 않습니다.상대적 좌절감이 그들을 매우 우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프링켈씨는 무엇보다 예기치 못했던 「살인적」실업이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설명했다.동독지역 전체로 보면 대략 9백90만의 일자리가 6백10만으로 줄어 3백80만명의 실업자가 생겼다는 것인데 94년 7월 현재 공식 실업률은 15.1%로 서독지역(7%선)보다 2배나 높은 것으로 돼있다(연방 재무부통계).

특히 실업은 경험이 없는 청년층,그리고 여성과 노년층에 집중돼 이들 세그룹은 「통일의 희생자들」로 지칭된다.

더구나 통일직전 동서독간에 합의를 본 협약의 「생산성 원칙」에 따라 동독지역 근로자들은 같은 일을 하고도 서독지역 동료들의 75∼80%에 해당하는 차별임금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이것도 4년전 60%에서 시작해 그동안 해마다 상향조정된 결과다.

라이프치히 거리는 도로포장 건물신축·보수공사등으로 외견상 대단한 활기를 띠고 있었지만 그 바닥에는 음악당에서 엿볼 수 있었던 노인 청년 여성층의 어두운 비애,2등시민의 서러움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서독출신들이 통일이후 더 잘살게 된 것도,더 만족스러워 하는 것도 아니다.일간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자이퉁의 외신담당 에디터 피터 스툼씨는 공무원들과는 달리 비교적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털어놓는다.

『동독출신들은 우리의 75%밖에 임금을 받지못한다며 불만이 많지만 자발적으로 일해본 경험이 없는 그들의 생산성은 사실 그 수준에도 못미칩니다.그들은 전보다 훨씬 살기 좋아졌는데도 계속 불만을 말합니다.동서독은 정신적 경제적으로 아직 분리돼있는 상태죠.한 15년후면 비슷한 수준이 될까요?』(연방정부의 93년말 현재 동독지역 생산성 공식집계는 서독의 40.2%다)

스툼씨는 서독지역 주민들 소득세에 통일세 성격의 「솔리대리티 택스」 7.5%가 추가돼 『아,동독용이구나』하고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동독지역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는 외에 서독지역은 통일에 따른 엄청난 재정·경제적 부담을 감당하고 있었다.

연방 재무부의 크리스티안 웅거씨는 94년 한해에만도 건설·설비부문에서 1천5백억 마르크(한화 약75조원상당,한국의 95년도 총예산은 54조 8천여억원)가 보내지는 등 지난 4년간 모두 5천8백억 마르크가 동독지역으로 보내졌으며 이는 통일후 해마다 연방예산의 4분의 1이 투자된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결국 서독지역 주민의 어깨에 25%의 짐이 얹혀진 셈이니 서독지역주민에게도 불만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최근 한 여론조사결과(디 자이트 신문이 94년 9월 9백80명을 대상으로 조사)에서도 나타났듯 동독지역 주민의 대다수인 69%가 통일후의 생활형편에 대체로 만족을 표하고 있다.(22%가 불만,8%가 매우 불만이라고 응답)그리고 장래를 긍정적으로 보는 주민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라는 현지 언론인의 설명은 통일 독일의 밝은 장래를 점치게 해준다.
1994-12-12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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