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국가체제 정비(백제를 다시본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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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4-05-27 00:00
입력 1994-05-27 00:00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면 백제의 국가형성 과정은 자못 다르다.주지하듯 백제는 북으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해온 부여주의 일파가 마한사회의 북방인 현재의 서울시 일대에서 지배권을 확립한 일종의 정복국가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부여족의 이동 정주를 계기로 하여 비로소 백제국가가 형성된 것인지 아니면 이미 마한토착세력에 의해 건국되어 발전 도상에 있던 백제 소국을 부여족이 정복한 것인지 비밀의 장막에 가려져 있다.그것은 어쨌든 백제국이 마한의 땅에서 형성된 부여족의 정권이라는 건국사정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정복자집단과 토착세력집단 간의 이중성이랄까 괴리현상이 심각했던 것으로 짐작된다.백제의 정치·사회사는 바로 이같은 이중성을 극복하기 위한 진통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백제가 직면한 또 다른 난관은 그 지형적인 특수성이었다.마한의 영역은 서해안을 끼고남북으로 길게 뻗쳐 있었으며 그 한가운데를 차령산맥과 노영산맥이 달리고 서해로는 금강과 영산강이,남해로는 섬진강과 탐진강이 각기 흐르고 있어 여러개의 고립된 지형구를 형성하였다.그 결과 마한사회는 소백산맥 동쪽에 펼쳐진 진한·변한사회에 비하면 현저하게 지역적 통일성을 결여하게 되었다.더욱이 서해안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서 마한의 50여개 소국들은 연안항로를 따라 한반도 서북지방에 설치된 중국군현인 낙낭군이나 대방군과 자유로이 접촉했다.이는 백제 주도하의 마한세력 통합을 장기간 방해했다.신라가 진한 12개국을 비교적 단기간내에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폐적인 자연환경에 힘입은 바 컸었다.그런데 마한사회는 각기 독자적인 지역성을 고집하는 다양한 지역사회를 포괄하고 있었으며 바로 이 다원적인 지역적 구성이 백제의 정복자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지리적 특수성 한몫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의 마한정복을 시조 온조왕 27년(AD9년)때의 일인양 기술했으나 이는 엄정한 사료비판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다.마한의 최북방에 해당하는 현재의 서울에서 국가형성에 성공한 백제가 남해안에 이르는 마한사회 전체를 호령하게 된 것은 대체로 4세기 후반 근소고왕 때의 일로 짐작된다.다만 마한을 정복했다고 해서 백제가 곧바로 한반도 서남해안지역에까지 통일된 지배망을 구축할 수는 없었다.최근 전남지방의 고분연구 성과를 토대로 하여 추측해 볼 때,백제가 이 지방의 마한세력을 명실공히 통합하여 동질화의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1백년쯤 뒤인 5세기 후반,즉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475년)한 이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사실 5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백제 지배층의 묘제인 횡혈식석실분은 영산강유역까지는 확대되지 못하고 있었으며,그대신 이곳에는 옹관묘(독무덤)가 여전히 유행했다.이 지역에서 옹관묘가 석실분으로 바뀌는 시기를 고고학 연구자들은 대체로 5세기말에서 6세기초로 보고 있다.
마한영역을 통합한 뒤 백제조정이 들고 나온 통치철학은 중국의 고전인 「주례」에서 많은 것을 차용한 느낌이 든다.이 「주례」는 중국전국시대 말기에 장차 출현하게 될 대제국의 정치적 체계를 위한 일대 청사진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거기에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포괄하는 통일적·체계적 이론이 제시되어 있다.
사비(부여)시대 재상을 선출할 때 후보자 3,4명의 이름을 적어 밀봉하여 바위 뒤에 두었다가 얼마뒤 개봉하여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뽑았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는 금강 대안의 규암면 울성산성 밑 호엽사터의 바위를 정사암 혹은 천정대라고 하는데 이 「천정」이란 말 자체가 「주례」에서 나온 것이다.즉 이 책의 천관 가재조에 의하면 천관은 3백60관을 총섭하는 최고의 관직이다.그러니까 천정대란 바로 그같은 천관의 정사를 수행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주례」의 통치철학
백제의 중앙정치제도를 보면 5,6명의 좌평이 재상으로 내관·외관을 합친 22개의 관청을 지휘 감독했는데 그 관청의 이름 중에는 사도부·사공부·사구부 등 「주례」에서 따온 것이 적지않다.실은 좌평이란 명칭 자체가 「주례」 하관 사마조의 「이좌왕,평방국」(왕을 보좌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이라 한데서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문무백관의 관등은 좌평 이하 16등급으로 정연한 체계를 이루었는데 그 명칭 또한 매우 우아한 한식으로 되어 있다.이는 토착적인 체취가 물씬 풍기는 고구려·신라의 관등 이름과는 큰 차이가 난다.
한편 지방통치조직은 국가권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차츰 정비되어 갔다.한성시대만 해도 전국의 각 지역세력의 대표자를 통해 성과 읍을 간접적으로 지배했다.근초고왕의 대정복사업이 성공리에 완수된 뒤 백제는 전국을 22개의 행정구역(당노)으로 나누고 지방관을 보내어 통치했다.이같은 담로체제는 공주로 천도하면서 더욱 충실해졌던 것으로 짐작된다.그러나 백제가 정연한 통치망을 구축하게 되는 것은 538년 부여로 천도한 뒤의 일이다.김동용봉봉래산향로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고도의 기술을 바탕으로 축적한 국력이 크게 작용했다.이 사비시대에 백제는 고사성(전북 고부)을 중방으로 하여 전국을 크게 5개 방으로 구획하고 37개 군을 두어 2백개 내지 2백50여개에 달하는 성을 장악했다.이 성은 후일의 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중 가장 취약
이같은 방·군·성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국가권력은 지역사회에 어느정도 침투할 수 있었다.다만 백제의 지방지배는 멸망의 순간까지 현저하게 군사적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민정을 게을리 한 것은 결코 아니었으나 대체로 보아 군정적 지배로 일관한 듯하다.이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백제사회의 구성이 본디 이중성을 띠고 있는 데다가 지역공동체의 세력이 너무나 강고하여 국가권력이 밑바닥까지 파고들어가는데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쨌든 이는 고구려나 특히 신라의 경우와 비교할때 백제의 커다란 취약점이 아닐 수 없다.신라는 지역사회의 말단인 촌에까지 도사와 같은 행정관을 파견한다거나 혹은 지방세력가인 촌주에게 관등(이른바 외위)을 준다거나 하여 이들을 최대로 지배망에 포섭한 기반 위에서 삼국항쟁의 대열에 뛰어들었던 것이다.백제가 신라에 패망한 원인을 통치체제 면에서 찾는다면 바로 이같은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이기동 동국대교수·한국사>
◎패망후의 마한/나주지역 중심 지방호족 할거/고유의 독무덤·금동관 출토가 증거
백제가 마한사회를 통합하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걸렸다.북방으로부터 남하한 백제가 비록 정복국가의 기틀을 잡았을지라도 토착세력을 쉽사리 편입시키지 못했다.이같은 정황은 오늘날 전남북지역에서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고대묘제를 통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지난 1917년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된 전남 나주군 반남면 신촌리 독무덤떼(옹관묘군)가운데 하나인 제9호분이다.마한의 전통묘제이기도 한 5∼6세기경의 이 무덤에서는 큰고리칼(환두대도),금동관,금동제신발(김동식리)등의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금동관은 9호분 안에 묻힌 8개의 독 가운데 가장 큰 이음독(합구식옹관)머리부분에서 나왔다.맞새김의 초화무늬 솟을장식(입식)을 단 외관안에 모자가 붙은 수준급 금동관으로 평가되었다.
이같은 유물은 5∼6세기경 까지도 영산강유역에는 막강한 토착세력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다시 말하면 나주지역 중심의 당시 영산강유역은백제 중앙정권의 통치권이 완전히 미치지 못한 가운데 지방호족들이 어느정도 할거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따라서 기층문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묘제 역시 마한고유의 독무덤이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영산강유역 나주지역에 백제의 묘제가 수용되는 시기는 6세기말∼7세기초다.이 시기는 사비시대에 해당하는데,백제 지배층의 묘제인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 나타난다.지난 1978년 당시 전남대 최몽용교수(현 서울대)가 발굴한 전남 나주군 반남면 대안리 제3호분이 이 시기의 백제계통 무덤이다.돌방과 널길(선도)을 갖춘 이 무덤에서는 긴목항아리(장경호),바리모양토기(발형토기),은장도조각,금실,쇠못 등이 출토되었다.
이렇듯 서남해안에 가까운 마한지역에는 백제의 발길이 더디게 미쳤다.<황규호기자>
1994-05-27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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