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에(사설)
수정 1992-06-06 00:00
입력 1992-06-06 00:00
나라와 겨레를 위하는 대의 앞에 순하는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다.이승을 사는 사람 누구나가 아끼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비굴해지기도 하는 귀한 목숨을 홍모와 같이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닌가.그러므로 나라가 침탈당했을 때 나라를 찾기 위해 싸운 선렬과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하고 지키기 위해 싸운 호국의 영령들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기려야 한다.국립묘지에서 울려 퍼지는 진혼나팔 소리를 들으며 숙연한 마음으로 나라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생각해 봐야 한다.
오늘이 없는 내일이 없듯이 과거가 없는 오늘은 없다.영욕이 교차된 과거위에 오늘은 있다.오늘의 우리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선진국 대열에 끼어들만큼 발전을 이룩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오늘까지의 역정에는 피땀 어린 과거가 있다.그중에서도 잊을수 없고 잊어서도 안될 것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핏자국이다.나라와 겨레의 영광을 위해 일신을 버린 그 희생정신 위에 오늘의 번영은 꽃피어 있다.그러기에 오늘이 영광되고 행복하면 할수록 잊지 않아야 할 일이 그 희생정신이다.
역사는 흐른다.흐르는 역사 따라 세상은 변전한다.우리의 국권을 침탈하면서 갖은 핍박을 가했던 나라와 다시 수교를 하고 있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켰던 북녘의 사람들과도 한핏줄로서의 맥을 이으려는 대화의 물꼬를 트고 있다.그뿐이 아니다.북녘의 야욕을 부추기고 도왔으며 고무·격려했던 적성의 나라들과도 공존공영에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그러나 그것은 국제사회를 사는 냉엄한 현실일뿐,순국선열이나 호국영령의 위업을 희석시키는 것이 아니다.또 비록 역사의 흐름이 그렇다 하더라도 잊지 않아야 할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용서와 망각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조기를 경건한 마음으로 달고 묵념을 올리는 가운데 지하의 그들에게 영광을 돌리면서그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는 하루로 삼았으면 한다.우선 그들의 희생정신부터 배우는 자세가 소망스러워진다.끝없는 이기의 패각에 묻혀 이타를 외면한 채 자기중심으로만 치닫는 삶부터 성찰해 봐야겠다.오늘의 모든 사회악과 부도덕의 근원이 여기 있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한발짝씩 물러날 줄을 알고 제 목소리를 낮추면서 남의 말을 들을 줄 알게되어야겠다.이런 심성들이 큰 줄기를 이루면서 물질 못지 않게 정신이 더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한다.그것이 선열·영령들에게 보답하는 길로 될 것이다.
포성은 멎었건만 아직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현충일을 맞는 마음이 착잡해진다.전국의 보훈병원에서는 6·25 전상자가 아직도 적잖이 심신의 아픔을 달래고 있다.특히 화염병 들던 젊은이들이 꽃다발 들고 그들을 위문하는 광경을 보고 싶어지는 현충일의 심경이다.
1992-06-06 2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