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장의 “중립 소신”/김영만 정치부기자(오늘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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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0-09-22 00:00
입력 1990-09-22 00:00
높고 화려하지만 실제 영향력은 크지 않은 자리중의 하나로 국회의장직을 드는 수가 많다.

대통령전용 승용차의 넘버가 1001호. 국회의장은 그 다음인 1002호를 탄다. 말하자면 국회의장은 우리나라에서 서열 2위다.

하지만 국회의장이 여권내에서 차지하는 실제서열을 그다지 높지 않은 것으로 통해왔다. 여당의 대표보다 영향력이 아래다. 어떤 경우에는 여당의 원내총무보다 국회운영에 대한 영향력이 적을 때도 있다. 국회의장이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박준규국회의장이 민자당과 정부의 추경예산 단독처리방침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섰던 일이 민자당 내외에 상당한 파장을 남기고 있다. 결론부터 말해서 꽤 신선하고 바람직한 방향의 충격이라 해야 할 듯싶다.

박 의장은 20일 의장실을 찾아온 김동영 민자당총무에게 민자당의원만의 추경예산안 처리를 도울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었다. 이어 21일 상오 「설득요원」으로 찾아온 김윤환정무1장관에게도 같은 입장을 확인하고 단독처리가 민자당의 확고한 의지라면 민자당이 이를 처리하되 자신은 법률의 범위내에서만 협조할 것임을 강조했다.

박 의장이 민자당의 단독 추경예산안 처리를 거부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국회법 46조의 규정 때문에 민자당이 요구하는 평민당 예결위원의 의장직권 임명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하나는 추경예산안이 수해복구의 긴급성 때문에 일방통과라도 해야 한다는 논리라면 수해복구와 관련된 예산만 처리하는 것이 사리에 맞다는 것이다.

민자당의 추경예산안 단독처리는 21일 낮 당수뇌회의에서 방침이 「처리유보」로 바뀜으로써 없던 일이 됐다. 오히려 박 의장으로서는 바뀔 방침과 맞선 형상이 돼 머쓱해진 셈이 됐다고도 할 수 있다. 민자당의 방침변경이 박 의장의 비협조 때문에만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국회의장이 한 정파의 일원이라는 소속감보다 우선해 의장으로서의 중립성에 더 비중을 두었던 이틀간의 반발은 상쾌한 느낌을 준다. 의장의 예기치 않았던 반발로 집권여당의 국정수행에 혼란이나 차질이 부분적으로 빚어졌더라도 그만한 값어치는 있는 일일 것이다.

지금껏 국회의장 자리가 외양과 내면의 힘크기가 달랐던 것의 상당부분은 그 자리를 거쳐간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의사당내에서조차 야당의원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한 대부분의 책임은 의장들 자신에게 있었다.

일부 민자당 중진의원은 박 의장의 협조거부를 『의장이 손에 피를 안묻히고 자기체면만 세우려 한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그러나 민자당 스스로가 추경 단독처리의 논리를 뒤엎고 방침을 변경했다면 비아냥은 되돌려져야 할 듯싶다.
1990-09-22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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