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신춘문예-시당선작] 가벼운 산/이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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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8-01-02 00:00
입력 2008-01-02 00:00
태풍 나리가 지나간 뒤, 아름드리 굴참나무

등산로를 막고 누워 있다.

오만상 찌푸리며 어두운 땅속을 누비던 뿌리

그만 하늘 향해 들려져 있다.

이젠 좀 웃어 보라며

햇살이 셔터를 누른다.

어정쩡한 포즈로 쓰러져 있는 나무는 바쁘다.

지하 단칸방 개미며 굼벵이

어린 식구들 불러 모아

한 됫박씩 햇살 들려 이주를 시킨다.

서어나무, 당단풍나무, 노각나무 사이로 기울어진 채

한 잎 두 잎 진창으로

꿈을 박고 있는 굴참나무

제 뼈를 깎고 피를 말려 숲을 짓기 시작한다.

생살이 찢겨 있는 굴참나무,

그에게서는 고통의 향기가 난다.

살가죽의 요철이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탁한

밥장수 할머니의 손등만 같다.

끝내 허리를 펴지 못하는

굴참나무가 세로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은 편견이다.

굴참나무가 쓰러진 것은 태풍 나리 때문이 아니다.

나무는 지금 저 스스로

살신성인하는 중이다, 하늘 가까이 뿌리를 심기 위해.
2008-01-02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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