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이 말하는 ‘빈 집’
수정 2004-10-01 07:58
입력 2004-10-01 00:00
태석(재희)은 집집을 돌며 열쇠구멍에 전단지를 붙이고,전단지가 떼어지지 않은 집에 들어가 자신의 집인양 얼마간을 살고 나온다.왜 이렇게 빈 집을 드나드는 걸까.“빈 집은 누구나의 마음 속에 있는 여백 같은 거죠.누군가가 자물쇠를 열고 찾아들어와 그 빈 곳을 채워주길 바라는.”
태석은 그렇게 빈 집에 생기를 불어넣는 존재다.어느날 빈 집인 줄 알고 들어간 평창동의 고급 주택에서 멍투성이인 선화(이승연)를 만난다.태석은 남편의 폭력과 소유욕에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떠난다.
고급주택부터 철거되기 직전의 아파트까지.김 감독이 카메라에 담는 공간의 계층은 다양하다.“제 영화에는 언제나 가족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이번에도 다양한 레벨의 가족과 그 안의 균열을 들여다보고 싶었죠.”
둘이 우연히 들어간 한 사진작가의 집엔 선화의 누드사진이 걸려 있다.과거 잘 나가는 모델이었던 선화.그녀는 사진을 여러 개로 조각내 다른 형태로 이어붙인다.이승연의 위안부 누드 파동이 떠올려지는 장면이다.김 감독은 “(이승연을 캐스팅한 뒤)의도적으로 넣은 장면일 수도 있다.”면서 “누드의 본질은 아름다움인데 음란 코드로만 바라보는 것을 비판했다.”고 설명했다.
태석은 골프공에 끈을 묶어 나무에 매단 채 스윙연습을 하곤 한다.그럴 때마다 선화는 그 앞에 머뭇머뭇 멈춰선다.“‘나를 이해할 수 있느냐.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물음”이라는 게 김 감독의 해석.소통이 되지 않았을 때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걸까.아무런 대답이 없는 태석의 골프공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간다.
#“균열된 가족이 화해하는 팬터지”
태석과 선화는 한 빈 집에서 노인의 시체를 발견하고 살인범으로 오해를 사 경찰에 연행된다.다시 집으로 돌아간 선화와,감옥으로 가게 된 태석.감옥 안은 마치 정신병원처럼 몽환적인 공간으로 묘사된다.“팬터지처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태석은 선화가 상상해낸 환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죠.”
감옥에서 4년간 사람의 시선 뒤에 숨는 훈련을 한 뒤 출소한 태석은 선화의 집에서 그녀의 남편과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남편의 폭력에 맞서기보단 유령 같은 환상으로 도피하는 건 아니냐고 따져 물었더니 김 감독은 “불신으로 균열된 가족이 화해하는 영화”라고 반박했다.“남편과 태석이 실제로는 중복된 인물일 수 있어요.선화가 남편의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기 위해 만들어낸 환상일 수도 있고요.그렇게 보면 2명이 화해하는 영화죠.”
결국 이번 영화의 귀착점도 ‘화해’다.날 선 비판의 감각이 무뎌지는 건 아닌가 걱정했더니 “갈수록 부드러워져 더 이상 영화를 못 찍게 돼도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웃었다.폭력의 수위도 낮아졌다.영화의 영어제목은 ‘3iron’.가장 사용하기 어려우면서도 일단 공을 날리면 강렬한 힘을 발휘하는 골프채다.영화는 이 채를 휘둘러 날아가는 공으로 상대방을 가격한다.“‘폭력’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김 감독.폭력의 강도보다는 이미지를 영화적으로 탐구하는 그는 이제 이단아보다는 예술가에 가까웠다.더이상 일반관객에게도 혐오스럽지 않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대신 은유와 이미지의 바다는 더 깊어졌다.
글 김소연기자
purple@seoul.co.kr
사진 김미성기자
492naya@sportsseoul.com
2004-10-01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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