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새 시집 ‘이 짧은 시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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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4-05-28 00:00
입력 2004-05-28 00:00
“고백하건대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않고 살아온 지난 5년 동안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시를 쓰지 않고 사는 시인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반성의 세월이었다.”

‘해맑은 시인’ 정호승(54)이 모처럼 ‘본업’(?)으로 돌아왔다.창비사에서 낸 시집 ‘이 짧은 시간 동안’은 어른을 위한 동화나 산문집 등에 매달린 그동안의 ‘글 외도’에 대한 부채의식이 잔뜩 묻어난다. 그래서인지 참회의 심정으로 쓴 74편의 시는 이전처럼 ‘십자가’로 상징되는 세상에 대한 속죄 의식,버려진 사람을 향한 따스한 시선,자기를 비우거나 낮추는 시인의 마음결이 배어 있다.

시인에게 현실은 “돈을 벌어야 사람이/꽃으로 피어나는 시대”이고 “돈이 있어야 꽃이/꽃으로 피어나는 시대”(‘꽃과 돈’)이다.그래서 장례식장 미화원 아주머니,무릎없는 걸인 등을 위무하며 “아무도 서울의 밤하늘에 노숙자들이/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줄을 모른다.”(‘밤의 십자가’)라고 탄식한다.

그런 세상을 정화하는 시인의 방식은 자기를 낮추거나 버리는 것이다.그래서 시인은 “살아간다는 것은 독을 버리는 일”(‘사랑에게’)이라고 노래하거나 “어제는 칼을 갈기 위해 강가로 갔으나/오늘은 칼을 버리기 위해 강가로 간다”(‘부드러운 칼’)라고 다짐한다.또 삶의 나이테가 쌓일수록 용서하자고 읊조린다.

그것은 “꽃에 묻은 돈의 때”를 벗겨야 하는 시인의 운명으로 연결된다.시인은 그래서 겨울철 추어탕집 미꾸라지에서 “결빙의 순간까지 온 몸으로/진흙을 토해내며 투명한 얼음 속에/절명시를 쓰고 죽은 겨울의/시인들”의 비장한 모습을 발견한다.그 모습은 또 자주 낙타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먼 지평선 너머로/지는 해를 등에 지고/홀로 걸어가던/어린 낙타 한마리”(‘어린 낙타’).“사막의 길을 가다가/밤이 깊으면/먼저 무릎을 꿇고/찬란한 별들을 바라본다”(‘무릎’)

이종수기자˝
2004-05-28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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