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나목(裸木)/손성진 논설고문

  • 기사 소리로 듣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공유하기
  • 댓글
    0
손성진 기자
수정 2018-11-28 18:15
입력 2018-11-28 17:42
물안개 자욱하게 흐린 날 저녁, 북한강가에 오도카니 선 나목 서너 그루. 어떤 바람에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무거운 이파리들을 다 떨어내고 처연한 모습으로 서 있을까. 무성하게 거느렸던 그 많던 엽군(葉群)들 언제 다 떠나고 무(無)의 경지에 이르게 됐을까.

뜨겁던 폭염도 이제 메마른 뿌리부터 가녀린 끝가지까지 견딜 수 없는 오한으로 변해 너를 떨게 하겠지.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삭풍은 마지막 남은 최후의 잎새마저 떨어뜨린다. 남김없이 벌거벗었어도 나목의 품새는 팔등신 미녀처럼 아름답고 우뚝 선 장군처럼 당당하다.

나목처럼 홀로 하늘에 내걸린 초승달. 그곳을 향해 갈래갈래 손을 뻗은 나목. 한 줄기 옅은 달빛이라도 온기를 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일까.

다만, 남은 것은 달빛밖엔 무엇도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잊지 마라. 떨어진 나뭇잎이 죽지 않고 네 뿌리를 이불처럼 덮어 한겨울을 견디게 해 줄 것임을.

기억하라. 머나먼 새봄이 오면 움틀 싹이 속곳도 없이 거친 네 몸뚱어리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그래서 꿈을 꾼 듯 혹한의 나날이 지나가고 따스한 봄날에 우리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임을.

sonsj@seoul.co.kr
2018-11-29 29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에디터 추천 인기 기사
많이 본 뉴스
1 / 5
1 / 3
광고삭제
121년 역사의 서울신문 회원이 되시겠어요?
닫기
원본 이미지입니다.
손가락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확대해 보세요.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