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가지 않은 길/황수정 논설위원

황수정 기자
수정 2017-12-14 00:18
입력 2017-12-13 23:12
그러기를 몇 달. 어쭙잖은 발길, 조심스러운 발자국, 노련한 발소리…. 나 모르는 사이 얼마나 많은 발자국과 발소리가 지나고 또 쌓였던 것일까. 얼금얼금 흉 자국 같던 잔디밭 길이 말짱한 샛길로 다져졌다. 가로등 아래 말갛게 목선을 드러낸 오솔길이 되어 제법 운치마저 풍긴다. 몰라서들 버려두는 건지, 알고들 아껴 보는 건지 가지가 휘게 매달려 마르는 구기자 붉은 열매와 묘하게 빚어내는 겨울밤의 정취.
그 길을 이제는 고맙게 걷고 있다. 루쉰의 오래된 문장을 생각하며. 본디 땅 위에는 길이 없었고, 걸어가는 발길이 쌓여서 길이 되는 것이라는. 희망도 땅 위의 길과 같다는.
서툰 발길로 길 없는 길의 모퉁이를 돌다 문득 이마에 부딪치는 것. 희망은 정말 그런 것인지 모른다.
sjh@seoul.co.kr
2017-12-14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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