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칼럼] 체험공간과 기대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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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5-08-03 14:12
입력 2005-08-03 00:00
어떤 사건이 다른 사건보다 이전, 또는 동시에, 아니면 이후에 발생했다는 서술이나 해명은 시계나 달력에 의거한 시간개념을 설정하지만, 과거·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개념은 관찰자와 그의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상대적 시간개념이라고 시간의 철학자 맥 타가르트는 구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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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교수
송두율 교수
올해 8월, 우리는 광복 60주년을 맞는다. 동양의 순환적인 시간해석에 따라 환갑(還甲)이 갖는 특별한 의미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광복 60주년을 특별히 기리는 이유는 한반도가 60년 전에는 일제의 식민지였고 그 이후에는 불행하게도 분단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건의 선후관계를 해명하는 데 있지 않다. 지난 60년에 걸친 우리들의 체험들이 현재 속에 녹아 있기에 여기에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접목하기 위해서다. 체험은 현재화된 과거이며 기대는 미래화된 현재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1772∼1801)는 이미 지나간 것과 앞으로 올 것의 비밀스러운 얽힘, 그리고 기억과 희망으로부터 우리는 역사의 의미를 배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필자가 의미하는 체험은 분명 기억보다 더 진한 의미를 띠고 있다.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역사와 인식 속에서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대 역시 그저 전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대 속에는 희망과 실망, 갈망과 의지, 우려와 호기심은 물론, 합리적인 분석도 함께 스며들어 있다.

과거에는 이러한 체험과 기대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억제하는 여러 이념적 장치나 제도들이 작동했는데 종교가 바로 이의 대표적인 예다. 체험과 기대 사이의 괴리를-‘천년왕국’이나 ‘극락세계’처럼-도래할 영원한 시간과 세계에 대한 확신이 채워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근대의 문턱을 넘어서면서부터 체험과 기대 사이에 생긴 차이와 간격을 메워 주었던 수단들은 과학과 기술 그리고 정보매체 등으로 급속히 대체되었다.

또체험과 기대 사이에 생긴 차이와 간격은 세대에 따라 달리 나타나고 있는데 주로 이차적인 체험에 의거한 새로운 세대의 기대지평은 기성세대의 그것보다 더 빨리 새로운 내용으로 교체된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선택하는 것이 젊음의 본질이기도 하고 과거-현재-미래를 연결하는 사건들의 지루한 고리를 일순에 끊어 보려는 젊음이 내뿜는 충동과 열망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직접적인 체험이 많아 아예 기대치를 낮추거나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기성세대와는 어차피 다를 수밖에 없다.

광복 60주년을 맞는 오늘, 동북아의 갈등, 남북과 남남갈등 그리고 세대간의 갈등의 뒤엉킨 모습은 흡사 돌아가는 세탁기안에서 서로 뒤섞여 여러 가지 색깔을 보여주는 옷가지들처럼 보인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을 맞아 필요한 덕목은 먼저 과거의 체험과 미래의 기대가 서로 착종(錯綜)된 현재의 의미를 제대로 음미하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종결된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가 만나는 현재는 매 순간의 연속이지만, 동시에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 형성된 전체적인 구조도 보여준다. 물론 우리는 복잡한 현재보다는 오히려 확실해 보이는 과거로부터 자기정체성의 뿌리를 더 많이 확인할 수도 있고, 때로는 불확실한 미래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상상력의 힘을 빌려 기대지평을 더 넓힐 수도 있다. 그러나 체험공간과 기대지평이 공존하는 이 복잡한 현실적 구조를 떠난 자기정체성은 애초부터 한계를 띨 수밖에 없다.

과거의 진실을 규명하는 문제가 현재와 미래를 위해 역사를 도구화하려는, 니체가 비판한 이른바 ‘역사적 병’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를 계몽의 도구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지난 60년에 걸친 우리의 체험공간은 실로 너무나 다사다난했다. 그래서 과거의 성공이나 재난으로부터 현재와 미래를 위한 교훈적 범주들을 발견하고, 타자의 이차적인 체험으로부터도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여 자기정체성을 현재와 미래 속에서 지속적으로 굳히는 역사의 기능은 우리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역사의 계몽적이며 비판적인 기능을 다시 확인해보는 그러한 8월이 되었으면 한다.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2005-08-0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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