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에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1980년대 초반 영국에 건너가 지금껏 살아왔다. 지난해 런던올림픽 때 조국에서 오신 손님들을 도와드린 인연에다 평창 동계스페셜올림픽의 성공 개최를 돕겠다는 마음으로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강원 평창에 도착한 게 지난달 23일이었다.
2500여 자원봉사자 중 61세인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다. 영어를 더 잘할 것 같은 젊은이들도 많았는데 ‘DAL’(대표선수 지원단) 단원으로 어떻게 선발됐는지 모르겠지만 난 대회 내내 ‘영국에서 날아온 아저씨 자봉’으로 통했다. 영국 선수 6명과 코치 등 임원 7명, 선수 가족 15명을 거드는 게 내 일이었다.
이제 성화는 꺼졌다. 해외에서 30여년을 보낸 ‘아저씨 자봉’은 평균 23세인 조국의 젊은이들과 부대끼며 아주 행복했다. 2주 남짓 자원봉사자들은 5~6명이 한 방에서 자는 열악한 여건에서도 자신의 일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대회를 치러냈다. 그러나 대회 초반 흠결도 적지 않았다. 중심으로 자리해야 할 조직위원회는 잘 눈에 띄지 않았고 겉돌았다. 충분한 예산도 확보되지 않은 것 같았다. 한마디로 자원봉사 없이는 대회가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봉사자들에 대한 지원과 배려가 부족했다. 나경원 조직위원장이 자원봉사자 모임에 직접 나와 해명도 하고 대책 마련을 약속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그래서인지 그 뒤 한결 나아졌다. 1분에도 수십 개 쌓이던 봉사자들의 카톡방 불평 문자도 사라졌다.
그러나 식사와 숙소에 대한 불평은 계속됐다. 장애인선수들에게 제공되는 도시락 점심은 정말 말이 안 됐다. 차갑게 굳어 목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지적장애가 있는 선수들을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이 들여 스트레스가 쌓여 문제를 일으킨다는 코치들의 불만을 지나치다고 할 수가 없었다. 장애로 불편한 이들을 이렇게 소홀하게 대할 바에는 대회를 왜 치르느냐고 고개를 내젓는 봉사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