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삼청동/서동철 논설위원
수정 2013-01-08 00:00
입력 2013-01-08 00:00
역대 정부가 삼청동을 인수위 사무실로 선호하는 이유는 당연히 권력의 핵심인 청와대 및 정부청사가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삼청동은 지금도 권력의 주변이라기보다는 여전히 권력의 핵심에 가깝다. 국무총리실이 세종시로 이전했음에도 총리공관은 남아 있을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가회동으로 넘어가는 언덕 위에는 감사원이 광화문 일대 관가(官街)를 감시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삼청동이라는 이름은 도교의 숭배대상인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의 세 성신(星辰·별)을 모신 삼청전이 있었던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삼청동’이라는 지명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중종 16년(1521)이니, 벌써 500년 전이다. 최근에는 산 맑고(山淸), 물 맑고(水淸), 사는 사람 또한 맑아서(人淸) 삼청동이라는 이야기도 동네 분위기와 맞물려 그럴듯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삼청동길이 복개된 중학천을 따라 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복개가 마무리된 것은 1960년대이다. 삼청동 계곡에서 발원하여 마을버스 종점, 금융연수원, 총리공관, 삼청동파출소, 국립민속박물관을 지나 경복궁 동십자각에 이르는 삼청동길의 땅밑에는 지금도 중학천이 흐른다. 중학천은 얼마 전 문을 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뒤쪽 지하로 흘러 청계천에 합류한다.
인수위가 금융연수원 터에 자리잡은 것이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 무기와 관련된 정부기관이 줄곧 자리잡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병기제조기관인 군기시의 화약 창고인 북창이 있었고, 병기의 근대화에 힘을 기울였던 구한말에는 기기국의 번사창이 들어섰다. 번사(飜沙)란 터지면 천하가 진동하고 대낮처럼 밝아지는 포탄제조법이니, 번사창은 화약공장이다. 고종 21년(1884)에 지은 번사청 건물은 금융연수원 경내에 여태껏 남아 있다. 새 정부가 부국강병에 힘쓰라는 선조들의 뜻이 담겨 있다면 지나친 견강부회일까.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2013-01-0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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